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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 : 스러지는 초심을 잡을 때, 발레도 삶도 나아간다



롱블랙 프렌즈 B 

한 여인이 춤을 춰요. 그녀의 이름은 ‘타티아나Tatyana’. 순수한 그녀는 오만한 남자 ‘오네긴Onegin’을 사랑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엇갈립니다. 세월이 흘러 귀부인이 된 타티아나에게 오네긴이 뒤늦게 구애해요. 번뇌하던 타티아나, 그를 뿌리치며 눈물 흘려요.

타티아나 앞으로 막이 내리자, 1400명의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내요. 조금 전까지 타티아나였던 강수진 발레리나가 활짝 웃습니다. 2016년 그가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50세의 나이로 은퇴작 「오네긴」*을 공연하던 날의 풍경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원작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레 드라마로 만든 작품. 세계적인 안무가 존 크랑코의 안무 버전이다.

이제는 한국의 국립발레단을 이끄는 강수진 단장을, 발레 애호가 김인애 인애스타일 대표와 함께 만났어요.




김인애 인애스타일 대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 동양인 최초로 최고의 장인 예술가에게 부여하는 캄머탠저린Kammertanzerin(궁정무용가) 선정.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의 공로 훈장까지. 강수진 단장은 언제나 최초, 그리고 최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2002년 이미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종신 단원이 됐던 강 단장. 원하는 만큼 최고의 자리에 머무를 특권이, 그에겐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감히 포기했어요. 2014년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 국립발레단의 단장 겸 예술감독이 됐죠. 올해는 사상 최초로 국립발레단장 4연임을 했습니다. 


Chapter 1.
오늘도, 발레 바를 잡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4층, 국립발레단 사무실. 벽에는 거대한 일정표가 걸렸어요. 1월부터 12월까지 국내외 공연과 오디션이 촘촘합니다. 보기만 해도 숨 가쁘다는 말에, 강 단장이 웃으며 말해요. “원래는 올해 물러나려 했어요.”

국립발레단장 겸 예술감독인 그의 업무는 다양해요. 우선 단장으로서 행정을 돌봅니다. 예산 확보부터 인력 계약, 각종 기획안을 검토하고 결재하죠. 국립발레단 뉴스레터도 미리 체크할 만큼 세심해요.

예술감독으로선 해외 안무가와 협업하고, 작품 라인업을 짜고, 단원들과 연습해요. 몸과 마음, 머리를 모두 쓰는 셈입니다. 발레리나로 살 때와는 또 다른 삶이죠. 

“저는 심플한 사람이에요. 계산을 좋아하지 않죠. 하지만 국립발레단을 이끌려면, 생각할 게 많잖아요? 기획과 미팅으로 머리가 꽉 차버렸어요. 작년 연말에, 이젠 쉬어야겠다는 직감이 들더군요.”

그런데 어쩌다 네 번째 연임을 수락했을까요? 강 단장은 두 가지를 꼽아요. 연습실, 그리고 관객들.

연임을 결정하기 전, 강 단장은 복잡한 생각들을 등지고 단원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바로 연습실에서요.

“후배들과 종일 함께했어요. 연습을 지켜보고, 같이 동작도 했죠. 땀 흘리면서 어느새 제가 웃고 있더라고요. ‘아, 연습실에서 충전되고 있구나. 현역 시절처럼 발레 바bar를 잡으며 다시 일어섰구나.’”

그에게 연습실은 ‘반복’의 장소예요. 100% 완벽한 공연은 없지만, 완벽을 향해 매일 똑같은 이야기와 연습을 거듭하는 곳.

“기본 동작인 글리사드glissade* 하나도, 몸의 선과 각도를 다듬기 나름이에요. ‘몸을 조각한다’고, 저는 표현해요.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우리 단원들이 잘 흡수하고 따라와 줘요. 덕분에 에너지를 얻습니다.”
*미끄러지듯 옆으로 옮겨 가는 스텝을 뜻하는 발레 용어.

연습실에 단원이 있다면, 무대엔 관객이 있어요. 다만 관객 눈에 어떻게 비칠지를 의식하며 춤추진 않습니다. 실제로 무대 위 무용수 눈에는, 관객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해요. 무대에만 강렬한 조명이 내리고, 객석은 어두우니까요. 

대신 손가락 하나에도 희로애락을 담고자 혼신을 다하죠. 무아지경. 관객의 존재를 잊고 오롯이 춤에 몰입할 때, 가장 관객을 위하는 공연이 됩니다. 무대 위 역설이죠. 

“무대에서 관객에게 잘 보이려고 의식하진 않아요. 발레는 결국 ‘이야기’예요. 무용수는 그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해야 하죠.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이 그 이야기가 돼야 해요. 내가 로미오를 지극히 그리워하는 줄리엣이 될 때, 관객도 줄리엣에 이입합니다. 순간 극장에 열기가 피어나요. 말로 설명 못 할 뜨거움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