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쳐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어요.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 아티스트들이 그들의 재능과 노력을 보여주고 있죠.
그들은 어떻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한국을 넘어 세계를 놀라게 했을까요?
영인 킴 : 그래미 3관왕을 기록한 한국인 아티스트

한국계 미국인 데이비드 영인 킴David Yungin Kim.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부터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포스트 말론Post Malone, 나스Nas 같은 가수의 음악이 그의 손을 거쳐 우리 귀에 꽂히죠.
한국인 최초로 무려 세 번이나 그래미Grammy*를 받은 그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가 그해 음악 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앨범, 작곡가, 가수 등을 선정해 주는 상.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중음악 상으로 여겨진다.
영인 킴이 강조하는 음향 엔지니어의 원칙이 있습니다. 스튜디오에선 기술만큼 ‘소통 능력’이 중요하단 거예요. 엔지니어는 아티스트와 프로듀서가 ‘원하는 사운드’를 만드는 역할이니까요.
그럼 앨범의 기획 의도, 아티스트가 원하는 방향을 아는 게 가장 우선이에요. 미팅 하나로 되는 건 아니에요. 영인은 여러 번의 ‘허심탄회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필요한 자질은 귀를 여는 일입니다. 음악을 들을 때나, 사람 이야길 들을 때나 같죠.
“클라이언트가 ‘네 생각은 어때?’라고 묻기 전엔, 절대 제 의견을 말하지 않아요. 완성한 믹싱에 피드백이 있으면 그걸 반영하고요. 원하는 바 안에서, 제가 생각한 완성도를 이끌어내죠. 이건 자존심을 버리는 게 아니라, 신뢰를 쌓는 일이에요. ‘이 사람은 내 의도를 존중하는구나’하는 믿음을 만드는 거죠. 누구나 내 말을 무시하는 사람과 일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영인이 자주 쓰는 방법. ‘친구’처럼 접근하는 겁니다.
“스튜디오에 음료수도 갖다 놓고, 에어컨도 빵빵하게 켜놓아요. 이런 사소한 행동이 신뢰 쌓기의 시작이죠. 클라이언트가 들어오면 항상 대화를 먼저 해요. 요즘엔 어떤 고민이 있냐, 어떤 경험을 했냐. 신뢰를 쌓아야 녹음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영인의 최종 목표 역시 ‘좋은 사람 되기’입니다.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2019년 유명 래퍼이자 사업가였던 닙시 허슬Nipsey Hussler과의 만남이 믿음의 계기입니다.
“‘좋은 사람’의 아우라를 믿어요. 닙시 허슬과 녹음할 때*, 스튜디오에 열 명 정도 있었어요. 허슬이 갑자기 나가더니, 물을 사 와서 한 병씩 나눠주는 거예요. 이렇게 높은 사람도 배려가 먼저일 수 있구나, 생각했죠.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힌 건, 다름 아닌 그의 태도였어요.”
*영인 킴은 닙시 허슬의 생전 마지막 앨범인 <랙스 인더 미들Racks In The Middle>의 음향 엔지니어링을 맡았다.
최근 영인 킴은 한국에서 프로듀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24년 4월, 첫 싱글 ‘노 로우키No Lowkey*’를 발표했죠. 그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행보가 더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해보세요!
*조용한, 절제된이라는 뜻의 속어.

저스트절크 : 한국인들이 모여 만든 세계 1위 댄스팀

댄스팀 저스트절크Just Jerk! 2022년 방송된 <스트릿 맨 파이터> 우승팀으로도 유명하죠. 방송 출연 이전에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팀이었죠. 한국, 아시아, 세계 대회까지 모두 우승했거든요. 2018년 평창올림픽 개막식 공연을 하기도 했고요. 또 저스트절크는 국내 최장수 댄스팀이에요. 올해로 13년 차죠.
영제이. 그는 저스트절크의 리더이자 댄서인 동시에 CEO입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새로운 춤 스타일을 한국에 들여온 ‘개척자’이기도 하죠. 그런 그에게 국내 최장수 팀을 이끌어나가는 비결을 물어봤어요.
그가 말하는 오래가는 팀의 비결은? 함께 성장하는 시스템!
저스트절크는 정기적으로 멤버를 모집해요. 오디션과 면접을 보죠. 실력,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가 있어요. ‘성장 가능성’, ‘지속가능성’, 그리고 ‘인성’. 영제이는 오래가는 팀을 위해선 실력보다, 성장을 즐기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해요.
“실력도 중요하지만, 저는 성장을 시키고 싶어요. 실력보다 오래 함께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 저에겐 더 좋은 사람이에요. 탑top으로 만들어 주는 건 제가 하면 돼요. 하지만 오래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죠. 함께 드라마를 만들고, 성공 스토리를 써나가는 게 더 멋지다고 생각해요.”
장기근속의 비결. 영제이는 “결과의 중요성”을 강조해요. 함께 성장하고 싶다더니 너무 성과주의 아니냐고요? 그는 성과 없이 자기합리화만 하는 리더가 되고 싶진 않다고 해요.
“결과를 잘 만들어 내는 리더, 아니면 과정을 좋게 하는 리더.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하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과정을 유하게 하면서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자기 합리화를 하는 리더들이 있어요. ‘우린 재밌었어. 우린 이 정도면 됐어. 우린 우리를 보여줬어.’ 이런 말을 하면서 배고픈 댄서 정말 많이 봤거든요. 그런 팀은 결국 해체돼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만큼 연습은 강도 높아요. 하지만 연습 외 시간에는 ‘친한 형, 오빠’가 되죠.
“평소에 좋은 형과 오빠가 돼 주더라도, 작업할 땐 진짜 선생님이 돼 주는 게 그들의 미래에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기술이 있어야, 방법이 있어야, 먹고 살 궁리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영제이는 당당하게 말해요. 저스트절크 출신 댄서는 전부 국내에서 최상위 티어에 있다고요.
“항상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게, 저스트절크 출신은 전부 국내에서 최상위 티어에요. 제가 그렇게 길러내요. 16살부터 19살까지 십 대들도 받아서 트레이닝시키죠. 루키들도 뽑아서 같이 성장할 수 있는 팀이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가 말하는 저스트절크의 이야기와 리더십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세요!

박혜상 : 역경을 딛고 성장한 한국 대표 디바

박혜상.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진 이름입니다. 서울대 성악과 졸업 후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 201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MET·메트) 무대에 주역으로 데뷔, 2023년 ‘꿈의 무대’라 불리는 카네기홀에서의 단독 공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디바로 국제 오페라 무대를 누비고 있어요.
화려한 프리마돈나의 삶에도 곡절이 있었을까요?
뉴욕에서 보낸 20대는 성악가 박혜상뿐 아니라, 인간 박혜상이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겪지 않았던 사춘기를 겪었어요. 내가 누구인지 헷갈려 했습니다.
“서양인 친구들은 대가 앞에서도 당당했어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자기 의견을 말했죠. 늘 활발하게 토론할 줄 알았고요. 무작정 그들처럼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가 그들처럼 행동하니 그들도 헷갈려 했어요. 저도 뿌리까지 한국인이다 보니 실은 불편했고요.”
정체성에 혼란을 겪자, 노래하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이제 막 뉴욕에서 커리어를 만들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에 위기가 온 거죠.
어느 날,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이 그에게 말했어요. “혜상, 너는 조건법을 자주 써.” 선생은 박혜상이 평소 말할 때, ‘내가 ~했더라면 ~했을 수 있을 텐데’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고 했어요. 그러지 말고 문장을 현재형으로 만들어 보라고 했죠. 그러면서 칠판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I am ____.’
침묵 속에서 10분이 흘렀어요.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빈칸만 뚫어지게 쳐다보았죠. 결국 눈물이 뚝뚝 흐르더랍니다. 그때, 선생이 대신 빈칸을 채웠어요. ‘enough.’
“‘I am enough.’ 완성된 그 문장을 보고 펑펑 울었어요. 그 순간, 많은 것들이 제 안에서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내면에서 끄집어내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그 간극과 균열을 받아들였어요.”
이 깨달음이 인간 박혜상의 타이틀이 됐죠. 도이치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은 뒤 발매한 첫 앨범의 타이틀 역시, ‘아이 엠 헤라*(I Am Hera)’입니다.
*헤라는 박혜상 성악가의 예명이다.
“‘나는 나로 충분하다’고 (모두에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여러분 모두, 이미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알려드리고 싶었고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유럽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오페라의 주역은, 실력파 아시아 소프라노보다 백인 동료가 맡을 가능성이 높았죠. 그 또한 받아들였어요.
그럼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여섯 시즌을 내리 공연했어요. 그러자 좋은 소식이 연이어 생겨났습니다. 주역을 따냈고, 세계 3대 오페라 홀인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공연을 할 기회도 얻었어요.
세상의 평가는 내려놓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 마침내 정상에 오른 소프라노 박혜상의 이야기를 아래 링크를 통해 직접 읽어보세요!

더 많은 각 분야 프로들의 이야기, 그 안에서 심도 있는 인사이트를 얻고 싶다면 이전 글도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