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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림 : 뉴믹스커피 디렉터, 위트 있는 생각을 물성화하다


롱블랙 프렌즈 C 

요즘 성수동에 검정 스프레이가 뿌려진 종이컵이 자주 보여요. 다름 아닌 믹스커피! 성수동에 드립 커피, 에스프레소도 아닌 믹스커피가 등장하다니?

카페 이름은 ‘뉴믹스커피.’ 배달의민족 창업자 김봉진 전 대표가 차린 그란데클립grandeclip의 첫 번째 프로젝트래요. 그란데클립은 클립처럼 사소한 것을 커다랗고 위대하게 만든다는 뜻이에요. 그 이름처럼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믹스커피’를 브랜딩해, 존재감을 만들었어요.

연무장길에 있는 매장에 들어가 봤어요. 바닥이 미디어 아트 패널로 돼있어요. 믹스커피 가루가 파도치듯 회전하는 영상이 흘러나와요. 카페는 3평 남짓한데 전면이 거울이라 그런지, 훨씬 커 보여요.

메뉴는 네 가지예요. 한국인은 역시 밥심일까요? 볶은쌀 맛이 있어요. 구수한 군밤 맛과 쌉싸래한 말차 맛도 있네요. 커피, 프림, 설탕이 들어있는 오리지널까지. 이 메뉴들을 슬러시로도 주문할 수 있대요. 디저트는 오란다를 재해석한 ‘도넛 오란다’, ‘건빵 크런치’, ‘떡와플’. 옛날 문방구에서 사 먹던 간식들 같아요.

익숙한 듯 독특한 이 카페, 누가 디렉팅했을까요? 배달의민족 전 마케터, 김규림 디렉터예요.


김규림 뉴믹스커피 디렉터·제품 기획자

배달의민족 마케터, 뉴믹스커피 디렉터, 책 『아무튼, 문구』의 작가, 제품 기획자, 두낫띵클럽 창립 멤버, 누적 조회수 780만의 파워블로거까지. 해왔던 일이 정말 많아요!

정작 김규림 디렉터는 본인을 심플하게 소개했어요. 바로 ‘문구인’. 만년필과 갈색 수첩을 꺼내 드는 손목엔, 자그마한 연필 모양의 타투가 새겨져 있었죠.

문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업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나의 문구 소비를 곱씹다 보니 남들의 소비도 눈여겨보게 된 거죠. 뉴믹스커피에도 “작은 물건을 좋아하는 나의 성격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고 했어요.

Chapter 1.
뉴믹스커피 : 기획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배달의민족 마케터였던 김규림 디렉터.  2023년 2월에 그란데클립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아이템이 뭔지 묻자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죠.

“아이템이 없는데 사업을 한다고? 재밌겠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에요. 그런데 처음부터 만들어가면 오히려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랜드 철학은 있었어요. ‘사소한 가치를 위대하게’. ‘가장 한국적인 F&B’로 범위를 좁혔지만 요식업을 해본 적 없는 ‘오합지졸’이었대요.

기획은 답을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이었어요. 먼저 아이템! 코리안 스타일을 녹일 아이템을 찾다가 ‘믹스커피’를 떠올렸대요. 한국을 빛낸 발명품 5위*가 믹스커피인 거 아셨나요? 이탈리아에 에스프레소, 미국에 아메리카노가 있다면, 한국의 대표 음료는 믹스커피라는 거예요. 사소한 카테고리를 멋지게 만들겠다는, 그란데클립의 철학에도 딱 들어맞는 아이템이었죠.
*2017년 특허청 조사 결과.

팀 내 이미지 통일이 필요했어요. 믹스커피가 워낙 대중적인 아이템이라 각자 생각하는 이미지가 달랐거든요. 후드티 뒤집어쓴 수험생이 찾기도 하고, 직장인들이 야근을 하면서 마시기도 하죠. 레트로풍의 다방에서 파는 것도 믹스커피예요.

“팀원들에게 ‘누가 믹스커피를 소비했으면 좋겠냐’고 질문했어요. 각자 이미지를 찾아와서 프레젠테이션 화면 한 장에 모두 집어넣어 봤죠. 유독 워크웨어를 입은 사람이 많더라고요. 뉴믹스커피의 유니폼이 점프슈트인 이유예요.”

메뉴 기획도 하기 전에 유니폼부터 생각하다니! 김 디렉터는 웃으며 말했어요.

“조감도를 보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한 장의 사진이나 작은 아이템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완성했어요.”

큰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작은 점을 연결하는 게 그만의 기획법이래요.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드문드문 떠오르는 요소들을 연결하다 보면, 유연하게 브랜드를 완성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계하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맞닥뜨리면 당황할 수 있어요. 꼬리를 물며 준비하면, 피드백을 유연하게 흡수하는 브랜드가 될 수 있죠.”

뉴믹스커피 매장에 새로운 메뉴판을 붙이고 있는 김 디렉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획 방식은, 브랜드 피드백을 유연하고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롱블랙

‘이게 회사야?’ 싶을 만큼 헛소리를 하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믹스커피 맛이죠. 한국적인 커피에선 어떤 맛이 나야 할까요. 뉴믹스커피 기획팀은 전통 시장으로 향했어요. 길거리에서 뻥튀기를 사 먹고, 한 봉지에 3000원 하는 쌀과자도 사 먹어봤어요. 때마침 겨울이라 여기저기 군밤을 팔고 있었죠.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또 한 가지 맛의 기준은 ‘백종원 프랜차이즈’로 잡았어요. 맵고 달다고 폄하되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맛을 선보이는 곳이죠. ‘백종원 프랜차이즈를 좋아하는 팀원에게 안 먹히면, 대중성은 꽝이다’라는 기준을 둡니다.

대신 패키지는 현대적으로 디자인했어요. 믹스커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깼죠.

“믹스커피를 한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다방 준비 잘 돼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아, 사람들이 기대하는 게 다방이구나. 기대심리를 깨버리면 더 재밌겠다!’ 싶었죠. 오히려 힙하게 가자, 힙하면 스프레이다, 다 사다 뿌려보자! 그렇게 바로 스프레이를 사러 갔어요. 기획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재밌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바로 해봤어요.” 

조금 엉성해 보이죠? 이런 ‘헛소리’가 오히려 뉴믹스커피 기획팀의 전략이에요. 수다 정도가 아니라, ‘이게 회사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헛소리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김규림 디렉터가 나서서 헛소리할 분위기를 만들었어요. 그 덕에 단체 대화방이 여러 개예요. 메뉴를 아무거나 적는 단톡방도 있죠. 앞으로 나올 맛이 20여 개나 있대요. 그중 하나는 무려 ‘김치맛’.

“헛소리를 아무리 해도 부끄럽지 않은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토양이 척척해야 씨가 잘 발화되듯이, 헛소리를 위한 토양을 잘 배양해야 돼요.”

한국적인 커피를 만들기 위해 기획팀은 전통 시장을 방문했다. ‘헛소리를 잘 받아들이는 게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시작’이라고 김 디렉터는 말했다. ⓒ롱블랙

Chapter 2.
자랑은 나의 힘, 물건으로 나를 표현하다

김 디렉터는 기획의 역량을 어떻게 쌓은 걸까요. 어렸을 때부터 물건을 좋아했대요.

“교실의 문구 얼리어답터였어요. ‘쟤한테 가면 신기한 게 진짜 많아!’가 최고의 칭찬이었죠. 초등학생 때부터 문방구, 팬시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어요. 매대 구석에 있는, 아무도 발견 못한 신기한 물건을 사서 자랑하고 다녔어요.”

91년생 김 디렉터에게는 문방구가 놀이동산이었어요. 떡볶이 안 사 먹고 문구를 모았어요.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물건 늘어놓고 자랑하는 게 최고의 낙!

그것도 모자라서 중학생 시절엔 해외 직구로 물건을 공동구매했어요. 버츠비 립밤, 러시아 생활용품, 일본 과자까지. 소비자를 설득하는 연습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중학생 때부터 방판, 직구를 한 거죠.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사고 싶은데, 배송비가 너무 비싸니까 같이 살 사람이 필요했어요. 친구들에게 물건을 알려주고, 설득하고, 사게 만들었죠.”

김 디렉터는 항상 물성이 있는 것에 끌렸어요. 내가 선택한 핸드폰 케이스, 물병, 노트 하나까지 다 나를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커갈수록 “쓸데없는 데에 돈을 많이 쓴다”며 타박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대요.

김규림은 어렸을 때부터 물건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문방구와 팬시점에서 새로운 물건을 발견하는 데 재미를 느꼈다. ⓒ롱블랙

면접도 물건 자랑하는 자리로

대학생이 되자, 직접 물건을 만들어보고 싶어졌어요. 경영 마케팅 전공이었지만 산업 디자인을 복수전공으로 택하기도 했어요.

우연히 배달의민족의 굿즈 상품을 보게 돼요. ‘스타벅스 맛 나는 맥심 커피’라고 적힌 컵.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눈이 번쩍 떠졌죠. 지금은 배달의민족이 2000명 규모의 회사지만, 그때는 20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회사였어요. 그리고 대학생 김규림에겐 ‘가장 가고 싶은 회사’였죠.

2014년 배달의민족이 제품 기획자를 채용했어요. 티오는 딱 1명. 김규림 디렉터는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대요. “가방 안에 자랑하고 싶은 물건 있어요?”

“‘당연히 있죠’ 하고 다이어리랑 만년필을 꺼냈어요. 이 만년필은 제가 17살 때부터 쓰던 거고, 이 다이어리는 가죽이 어쩌고저쩌고… 아마도 제품 기획자를 하려면 물건을 좋아해야 한다고 판단한 거겠죠. 제가 신나서 자랑하는 모습을 보고 절 뽑은 거예요.”

그렇게 ‘물건 덕후’ 김규림은 배민의 첫 제품 기획자로 입사했어요. 입사하면서 만들고 싶은 물건들 리스트를 쭉 적었더니, 노트 한 페이지를 꽉 채우더래요.

물건 자랑을 즐기던 김 디렉터는, 배달의민족 면접 자리에서도 자신의 필기구를 자랑했다. ⓒ롱블랙

Chapter 3.
배민 문방구 : 위트 있는 생각을 물성화하다

입사 첫 회의 날. 김봉진 대표가 “때수건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모두 때가 있다’는 문구를 넣었죠. 배달의민족 굿즈는 재치 있다고 점차 입소문이 났어요. 제품은 수지타산을 제대로 계산하지도 않았어요. 재미만 있으면 오케이였죠.

“때수건 1000개를 만들어서 5만 명에게 닿을 수 있다면, 광고 5개보다 더 효과적인 마케팅이잖아요. 수익을 너무 따졌다면 거기에 매몰됐을 거예요. 당장의 매출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웃겨서,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는 데 집중했어요”

제품 기획자 김규림은 점점 성장했어요. ‘카페못가’라고 적힌 머그컵, ‘흑심있어요’ 연필, ‘누가 나 좀 말려줘요’ 수건까지. 배민을 일상에 스며들게 한 위트 있는 제품이에요.

“매일 쓰는 물건은 그 영향력부터 달라요. 한 사람의 인생에 밀접하게 닿아있는 거잖아요. 어느 회사의 판촉물을 구매해서 쓴다는 건, 곧 그 회사의 위트에 공감한다는 뜻이죠. 소비자를 팬으로 만드는 건, 다 그런 소소함이에요.”

물건 기획은 보통의 방식을 뒤집어서 했어요. 카피를 먼저 생각하고, 물건을 만들었죠. 

“물건에 맞는 카피를 내는 것보다, 카피가 나온 뒤 제품을 만드는 게 훨씬 쉬웠어요. 생각을 물성화하는 거죠. 그렇게 해야 물건과 카피가 제대로 달라붙더라고요.”

‘누가 나 좀 말려줘요’ 수건. 제품기획 팀이 마케팅 팀에 흡수돼 ‘마케터’ 직함을 달게 됐지만, 김 디렉터는 꾸준히 제품을 기획하고 제작했다. ⓒ배달의민족

일놀놀일 : 회사는 버킷리스트를 지우는 곳

김 디렉터의 제안으로 온라인 쇼핑몰도 만들었어요. 이름은 ‘배민문방구’. 문방구는 일상에 필요한 물건을 파는 곳이잖아요! 탱탱볼도 팔고, 튜브도 팔았어요. 상품군을 100가지 이상 늘려갔어요.

“제가 만들고 싶은 건 다 만들었어요. 워라벨이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회사에서 자아를 찾으면 왜 안 되죠? 전 너무 행복했어요.”

세븐일레븐과 컬래버레이션도 했어요. 100만 개씩 생산해서 전국으로 뿌렸죠.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자신이 기획한 아이스크림 포장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더래요. 겉에 ‘얼음 땡’이라고 쓰여 있었죠. 그 어느 때보다 기뻤죠. 그만큼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만든 제품을 소비했다는 뜻이니까요.

‘노는 것처럼 일하고 성취감도 느끼는데, 월급까지 받다니!’ 일하듯이 놀고 놀듯이 일했어요. 줄여서 ‘일놀놀일’이에요.

“일하는 자아와 노는 자아가 반드시 분리될 필요는 없잖아요. 두 자아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적어도 저는 구분이 없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어요.”

김 디렉터는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 놀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아이디어가 물성화되는 과정을 즐긴다. ⓒ김규림 블로그

Chapter 4.
두낫띵클럽 :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브랜딩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이 너무 쉬워졌어요. 정신 차려보니 버킷리스트도 다 지운 지 오래였죠. 흥미가 재빨리 달아났어요.

“나와 이 브랜드의 유통기한이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 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버킷리스트가 있을 텐데, 그게 더 참신하고 재밌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요.”

회사를 박차고 나왔어요. 다음 스텝은, 더 큰 회사였을까요? 아니에요. 잠시 쉬기로 한 김 디렉터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 그 자체가 되기로 해요. 배달의민족 동료였던 이승희 마케터 그리고 모베러웍스와 협업해 ‘두낫띵클럽’을 꾸렸어요.

물건으로 사고하는 김 디렉터.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선 어떤 물건이 필요할까?’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줄 있는 노트Ruled는 지켜야할 규칙이 있으니, 줄 없는 노트No Ruled를 만들었어요. 투두To-do리스트 메모지가 아니라 낫투두리스트Not To-do예요. 오늘 하지 않을 것을 쓰는 메모지죠.

두낫띵클럽 회원 카드엔 이렇게 쓰여 있어요. ‘행동 강령 :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죄책감 느끼지도 않습니다.’

“사람마다 목마른 지점이 있어요. 이를 간파해 카피로 싹 넣어주거나, 물건으로 형체를 만들어 주면? ‘맞아! 내가 생각했던 게 바로 이거였어!’ 외치곤 해요. 두낫띵클럽도 그랬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그럼 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담은 물건을 손에 쥐여주었죠. 안도감을 준 거예요.”

김 디렉터는 그간 회사에서 쌓은 제품 개발의 스킬을 적극 활용했어요. 종이 그람 수, 컵 재질, 심지어 동대문에서 퀄리티 있게 잘 만드는 사장님 리스트까지. 그 모든 게 그의 스킬이었어요.

서교동 잡화점 오브젝트에서 열린 두낫띵클럽의 팝업스토어. 오픈 첫날 약 1000명이 찾아왔어요. 연예인이나 셀러브리티가 홍보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모티비MoTV와 SNS로 보고 메시지에 공감한 사람들이었어요.

퇴사 후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노트, 컵, 볼펜, 의자로 표현했다. 회사에서 쌓은 제작 요령을 적극 활용했다고 김 디렉터는 말했다. ⓒ모베러웍스

Chapter 5.
주저리주저리 메시지를 이야기하라

김 디렉터는 개인 제작 물건도 종종 만들어요. 이런 딴짓이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활력을 준다고 생각하죠. 규모는 한 번에 1000개 정도로 크지 않아요.

“제작은 회사에서 배운 스킬이잖아요. 회사가 나를 이용하듯, 나도 회사를 이용한다!”

2022년 1월 1일엔 평소 좋아하던 일러스트레이터, R.O.블레크먼R.O.Blechman에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뉴요커 표지 작업을 여러 번 했던 세계적인 작가예요. ‘당신의 그림이 너무 좋고, 잘 보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한 시간 후에 고맙다는 답장을 받았어요.

이렇게 연결된 김에 노트 에디션을 만들어보면 좋겠다 싶더래요. 특히 좋아하던 ‘셀프 그로스Self Growth’ 그림을 넣어서요. 꽃이 자기 자신에게 물을 주는 그림이에요.

노트 이름도 셀프 그로스라고 정했어요. 누군가는 필사를 하면서, 누군가는 요리를 하면서 이 노트를 쓰고, 성장하면 좋겠다는 의미를 담은 거예요.

최소 주문량은 1000권. 그런데 의문이 생겼어요. ‘나는 이 그림이 좋은데,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돈을 주고 살 만큼?’ 회사의 이름이 아닌, ‘김규림’ 이름으로도 제품이 팔릴지 의문이었죠.

김 디렉터는 ‘10권만 팔려도 내가 쓰면 되니까’라고 생각했어요. 상세 페이지에 내가 어떻게 이 작가를 알게 됐는지, 왜 좋아하는지, 이 작가의 그림으로 노트를 만든 이유는 뭔지, 세세히 소개를 쓰고 잠들었어요.

노트 1000권이 하루아침에 다 팔렸어요. 홍보 하나 없이. 

“그때 깨달았어요. 사람들은 ‘이야기’를 사는 거구나. 전 기획을 할 때 ‘예쁘니까’ 이렇게는 접근하지 않아요. 왜 이 물건이 세상에 존재해야 되는지, 이야기를 가장 먼저 생각해요.”

그래서 상세 페이지가 중요해요. 예상외로 사람들은 ‘주저리주저리’를 좋아한다고, 김 디렉터는 표현했죠. 아무 말이나 홍보성 문구를 쓰라는 게 아니에요. 이 물건을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상세히 쓰는 거예요. 만질 수 있는 영역만 ‘물건’이 아니에요. “그 안에 담긴 이야기까지가 물건”이라고 그는 말해요.

“상세 페이지 만드는 걸 제일 좋아해요. ‘이 제품을 내가 만들었는데 왜 만들었어, 이걸 어떻게 썼으면 좋겠어.’ 이렇게 계속 가치 전달을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물건에 숨어있는 메시지를 사는 거니까요.”

뉴믹스커피도 블로그에 꾸준히 ‘연대기’를 올리고 있어요. 연대기를 보고 카페에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요. 그들은 스토리를 보고 팬이 되죠.

“구구절절 사소한 이야기를 많이 써놨어요. 일하다 뭘 먹었다, 팀원이 이런저런 헛소리를 했다… 남의 일기를 보고 브랜드의 팬이 되기도 해요. 와서 ‘이거 연대기에서 봤어요!’ 이야기해 주시기도 하고요.”

직접 제작한 셀프 그로스 노트. 상세 페이지에 이메일을 보낸 사연부터 종이와 표지 재질을 선택한 이유까지 상세하게 적었다. ⓒ김규림 블로그

Chapter 6.
문구인 : 숲이 아닌 꽃을 보는 사람도 필요하다

디렉터는 숲을 보는 사람일 것 같지만, 김규림 디렉터는 꽃을 들여다보는 사람이에요.

“나의 마음을 끄는 것들이 뭔가를 생각해 보면, 작은 것들이었어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들이었죠. 크기가 작다고 해서, 거기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작지는 않잖아요.”

그는 소문난 문구 마니아라고 했죠. 이때 문구는 단순히 필기구만 뜻하는 게 아니에요. 문방구에 가면 과자도 팔고 인형도 팔듯,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물건을 모두 포괄해요.

“내 삶을 관통하는 한 글자가 있다면 뭘까?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그때 모 문구회사 홈페이지에서 대표의 인사말을 우연히 접했어요. ‘OO사를 아끼는 문구인 여러분!’ 과장을 좀 섞어 말하자면, 암실에 쨍하고 빛이 드는 느낌? 제가 평생 찾아다녔던 단어였어요.”

김규림 디렉터는 ‘문구인’이라는 단어를 찾자, 비로소 자신을 납득할 수 있었다고 고백해요. 성인이 문구를 좋아하면 아직 철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자잘한 소비를 즐기는 사람은 “씀씀이가 헤프다”는 이야기도 듣고요.

하지만 김 디렉터는 당당해요. 타고난 ‘문구인’이라, 어쩔 수 없이 작은 물건에 흥미를 느낀다고 말하죠. 그리고 그 재미를 대중의 재미로 확장하는 것이, 업이 된 거예요. 

“한때는 숲을 볼 줄 모른다는 게 콤플렉스였어요. 저는 앞에 있는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가꾸는 것에 훨씬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거든요. 숲을 조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작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필요한 것 아닌가요?”

숲을 조망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작게 핀 꽃을 보는 사람도 디렉터가 될 수 있다. 김규림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문구인’이다. ⓒ롱블랙


롱블랙 프렌즈 C

나를 정의하는 단어가 당장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겨우 그런 걸 좋아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죠. ‘문구인’이라고 자신을 정의한 김규림 디렉터가 롱블랙 피플을 위한 그림을 그렸어요. 종이를 펼치더니 거침없이 선을 그었죠.

“나는 OO인이다!”

롱블랙 피플, 빈칸을 어떻게 채우고 싶으세요? 친구에게 공유해서 이야기 나눠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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