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한 명도 오지 않는 병원이 있습니다. 심지어 원장도 자리를 자주 비우죠. 병원에 앉아서 환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환자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거든요.
이 기묘한 병원의 이름은 ‘건강의집의원’. 이곳을 만든 원장이자 1호 의사, 바로 홍종원입니다. 그의 앞에 붙는 수식어가 있어요. ‘찾아가는 의사’.
그를 만나러 강북구 번동을 찾았어요. 수유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20분쯤 가면 동네 어귀에 다다릅니다. 조금 일찍 도착했더니 역시나 부재중이었어요. 병원 특유 소독약 냄새조차 나지 않는 공간. 천장까지 잎이 뻗은 여인초만이 조용히 저를 반겨주고 있었죠.
인터뷰 시간에 맞춰 홍종원 원장이 나타났습니다. 배가 볼록한 갈색 왕진 가방에 눈이 갔어요. 본래 카메라용이었던 이 가방을 열자, 온갖 의료용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청진기, 주사기, 혈압계… 그는 매일 이 가방을 어깨에 걸고 오패산 자락을 누비죠.
그가 만나는 대부분의 환자는 장애인, 와상환자*, 고령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일정 외에도 주야장천 뛰어다닙니다. 그의 휴대폰은 환자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로 쉴 새 없이 울려요. 인터뷰 중에도, 그는 몇 번이고 전화를 받으러 나갔어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편해서 누워있는 시간이 많거나 누워서 지내야 하는 환자.
홍종원 건강의집의원 원장
안녕하세요, 찾아가는 의사 홍종원입니다. 저는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요. 강남역 사거리 CCTV 철탑은 물론, 온갖 쓰레기를 잔뜩 모아놓은 집까지. 덕분에 가끔 롱블랙 같은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을 받기도 하죠. 어느 날은 기자 한 분이 이렇게 묻더군요. “의사가 왜 그러고 살아요?”
글쎄요. 제가 대단한 신념이나 정의로움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사람을 돕는 의사이고 싶었어요. 가까이 지내는 조금 만만한 사람이요.
어떤 명약으로도 소생할 수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순간들과 마주하고 살아요. 그때마다 과연 의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고민하죠.
질병도 죽음도 실패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죽기 마련이죠. 그 시간을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함께 겪어가는 것.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Chapter 1.
운동선수가 꿈이었던 소년, 우연히 의사의 길을 걷다
의대에 간 건 우연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안 믿는 눈치더라고요. 의사라는 직업을 꿈꿔본 적은 없었어요. 어쩐지 고리타분하고 창의적이지 않을 것 같았죠.
어릴 때는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친구들과 뛰어노는 걸 좋아했거든요. 초등학교 때 장래 희망을 적으라고 하잖아요. 4학년 때 축구선수, 5학년 때 야구선수를 적었어요. 특히 야구를 정말 좋아했죠.
중학생 때는 공대에 가고 싶었어요. 멋있어 보였거든요. 기술을 개발하거나 사회를 발전시키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대학교 입시 때도 공대를 두 군데 지원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의대에 원서를 넣었죠. 그런데 공대는 모두 떨어지고, 딱 하나 쓴 의대에 붙었더라고요. 군말 없이 갔죠. 솔직히 말하면, 재수하는 게 정말 싫었거든요.
병원 밖에도 환자가 있다
그런데 막상 배우다 보니, 의사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기초과학, 임상의학, 뇌과학. 인간에 대해 배우는 학문이잖아요.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죠. 조금 거창한 표현이지만, 의학이 저한테는 그렇게 다가왔어요.
궁금해지더라고요. ‘의사는 뭘 하는 사람일까?’ 저 나름대로 탐구도 좀 했죠. 의사가 나오는 소설, 드라마, 영화를 닥치는 대로 봤어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 고민도 했고요.
그러다가 교내 의료봉사 동아리 ‘누룽지’에 가입했어요. 교수님, 동기들과 함께 지역 환자를 방문해 진료하는 일을 했죠. 인기 동아리도 아니었는데 왠지 끌렸어요. 병원 바깥에 있는 환자들을 만나는 일이 마냥 좋았습니다.
네팔에 가서 환자들을 만나고, 기름이 유출된 충남 태안반도로 봉사활동을 나갔어요. 고공 농성 중인 75M짜리 굴뚝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사다리 하나 놓고 바들바들 떨면서요.
그러다 보니 점점 현실이 보이더라고요. 의학계에서 바라보는 환자와 실제 환자들의 삶에 제법 큰 간극이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한번은 젊은 시절에 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중년 남성분의 집에 갔어요. 고령인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어요. 전자 혈압계로 혈압 측정하는 게 끝이었습니다. 의학적인 역할은 그게 전부였어요. 남은 시간은 집에서 환자와 보냈고요. 그런데도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한 번은 그분이 바깥에 나가고 싶다고 하시길래 휠체어에 태웠어요. 알고 보니 산책이 처음이더라고요. 어머니 혼자 돌봐야 하니 산책까지는 힘에 부쳤던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의학적인 역할은 없었지만, 그분들이 삶에서 필요로 하는 걸 도와드릴 순 있던 거예요. 보호자가 혼자서 엄두를 못 내는 그런 일을요.
그때 배웠어요.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Chapter 2.
하얀 가운을 벗고, 병원 밖으로 향하다
졸업을 앞두고 여러 선택지가 있어요.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에 들어갈 수도 있었어요. 신약을 개발해서 의료산업에 이바지할 수도 있었고요. 다들 좋은 과, 좋은 병원을 가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하더군요. 전 둘 다 제 길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 웃기지만, 더 이상 경쟁이란 걸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물론 경쟁해서 더 좋은 의사가 되면 사회적 성공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건 제가 생각하는 의사의 길이 아니었어요. 병원 밖 환자를 돌보고 싶다는 생각도 떨쳐낼 수 없었고요.
동네 한량이 된 27세 청년의사
강북구 번동에 집을 얻었어요. 공중보건의사*로 지내면서 낮엔 남양주 보건소로 출근하고, 밤엔 동네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죠. 그때부터 6~7년 정도 동네에서 굴러다녔던 것 같아요. 사람 만나는 게 좋더라고요. 이들과 더 가까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확고해졌어요. 군 복무를 마치고 병원 대신 이 동네로 왔습니다.
*군에서 복무하는 대신 3년 동안 농어촌 등 보건의료 취약지구에서 공중보건 업무에 종사하는 의사. 의대생들은 의사 면허 취득 후 공중보건의사나 군의관에 지원할 수 있다.
바로 방문 진료를 계획한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창고로 쓰던 공간을 임대해 동네 사랑방처럼 꾸몄어요. 저는 그 안쪽 방에서 살았고요. 주민들이 편하게 드나드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죠. 밥도 해 먹고, 수다도 떨고.
사람들은 많이 왔어요. 하지만 아주 가깝게 다가가기는 어려웠습니다. 의외였어요. 저는 의사니까 주민들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선의만 있다면 어떻게든 잘될 줄 알았던 거죠. 사실 당연하잖아요. 누군가의 삶에 녹아드는 건 어렵고 힘들어요.
만약 제가 일회성으로 접근했다면 오히려 쉬웠을 거예요. 행사 개최하고, 음식 나눠주고 끝. 하지만 삶을 함께한다는 건 차원이 다르죠.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요? 무작정 같이 시간을 보냈어요. 함께 축구도 하고, 술도 마시고. 이발소 아저씨가 호출하면 달려가서 휴대폰 수리도 해드리고.
그러다 보니 조금씩 신뢰를 얻게 되더라고요. 마을 활동에도 관여하게 되었죠. 청년 공동체를 만들고, 청소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어르신들을 돌보며 지냈어요.
Chapter 3.
방문 진료, 돈으로 모든 걸 환산할 수 없는 세상
병원 일을 놓은 건 아니었어요. 동네 병원에서 대진을 했어요. 의사가 자리를 비우면 대신 환자를 진료하는 식으로.
그러다 2018년에 방문 진료 제도가 생겼습니다. 정부가 커뮤니티케어 종합계획을 발표했어요. 지금껏 의료기관 중심으로 환자를 돌봐왔지만, 이제부터는 지역사회 중심으로 가자는 취지였죠. 의료법 제33조*에 나와 있듯 부득이한 경우엔 보호자나 환자의 요청으로 의사가 방문할 수 있거든요.
*의료법 제33조에 따르면 환자나 환자 보호자가 요청하는 경우 부득이한 사정에 의한 경우에 예외적으로 방문 진료가 가능하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2019년 3월, 건강의집의원을 열었어요. 인원은 셋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의사 두 명에 간호사 한 명. 초반에는 많이 헤맸어요. 선례가 없었거든요.
금전적으로 넉넉한 편도 아니었죠. 그래도 그냥 했던 것 같아요. 버티는 마음으로. 저에게 방문 진료란, 결코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거든요.
치료가 불가능한 순간, 의사의 역할이란
일반적인 병원 진료를 생각해 볼까요. 환자가 병원에 들어가서 접수를 합니다. 어떤 증상으로 오게 되었는지 간략히 말한 뒤 한없이 기다려요. 차례가 돌아와도 진료는 5분 남짓. 그 짧은 시간에 환자는 그저 환자로만 존재해요.
병원에 오는 순간, 환자분의 삶은 다 사라집니다. 인간이 사라지고, 환자복을 입은 환자의 형태만 남아요. 그냥 몸뚱어리만 남는 거죠. 종이 인형 오려서 딱 붙여놓은 것처럼.
방문 진료는 조금 다릅니다. 환자 집에 도착하면 최소 30분은 소통하는 데 써요. 정해진 진료 방식이나 규율도 없습니다. 환자가 연락을 해오기도 하고, 제가 먼저 연락하기도 하죠. ‘이쯤 되면 약이 필요하실 텐데’ 하고요.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습니다. 한 할머니였어요. 거동을 못하셨는데 사실상 치료는 불가능했어요. 병원에서 ‘이제 오지 마세요’라는 말까지 들었답니다. 요양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았고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제가 다 막막했어요.
일단 찾아가 뵀어요. 할머니를 살피고 약을 처방해 드렸죠. 사실 뭘 했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그런데 다음 주에 다시 찾아갔을 때 보호자분이 그러더라고요. “선생님 다녀가시고, 제 마음이 참 편안해졌어요.”
그 말을 듣는데 순간 멍하더라요. 치료 너머에 마음의 울림이 있다는 걸 알았죠. 진심을 다해 소통하니, 막다른 길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다른 길이 보이더라고요.
의사가 의료적인 처방을 할 수 없는 상태의 환자가 분명 있어요. 저는 무작정 희망을 이야기할 수도, 절망을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때 의사의 역할이란 뭘까요. 계속해서 그 질문에 답을 찾고 있어요. 어쩌면 제가 하는 일은 치료보다 위로에 가까운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Chapter 4.
환자의 집에서만 보이는 것이 있다
외래 진료와 방문 진료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환자의 집으로 직접 들어간다는 것. 집은 삶 그 자체예요. 어떤 집에선 그분이 살아온 시간이 한눈에 쫙 보이기도 하죠.
한 할머니는 집에 온갖 쓰레기를 다 모아놓고 사셨어요. 동네에 ‘이상한 할머니’라고 소문난 분이었죠. 하루는 그분을 찾아가 대화를 나눴는데, 삶에 대한 미련과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아픔에 대해 말씀하시더군요. 방문이 순조로웠던 건 아닙니다. 첫날에는 한 발자국도 못 들어가게 하셨어요. 하는 수 없이 복도에 서서 이야기했어요.
이런 우여곡절에도 방문 진료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문을 열어주시는 환자분들께 너무 감사하거든요. 그분들께 문을 연다는 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나의 지저분한 모습과 정돈되지 않은 삶까지. 그 모든 걸 내보인다는 뜻이죠.
거동이 어려워 소변을 잘 못 보시는 환자의 경우 온 집안에 냄새가 나기도 해요. 저도 사람인지라 인상이 찌푸려지기도 하죠. 하지만 그 또한 그분이 살아가는 방식인 거예요. 원래 인간의 삶이 그렇게 깨끗하지 못합니다. 대변도 소변도 다 관리해야 하죠. 좀 지저분할 순 있지만, 결코 더러운 일은 아니에요. 살아가기 위한 활동이니까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에요. 끊임없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것. 살아간다는 게 그런 거잖아요.
Chapter 5.
돌봄이란 무심하게 서로를 봐주는 것
저는 이런 걸 ‘돌봄의 순환’이라 부릅니다. 거창하고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냥 서로서로 봐주면서 알아가는 거죠.
편의점이나 슈퍼에 가면 무심히 스쳐 지나는 동네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 또한 느슨한 돌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꼭 안부를 주고받지 않아도 무심하게 서로를 살펴보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 무심한 눈길을 통해서도 삶은 유지되거든요.
우리 사회가 좀 더 건강해진다는 건, 비단 의료 서비스가 발전하고 인프라가 개선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아요. 좀 더 본질적인 기저에 깔린 우리의 관계를 살펴봐야 하죠.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무심하다’는 표현을 제가 참 좋아합니다. 서로를 대단히 돕는다기보단, 알 듯 말 듯 신경 쓰면서 살아가는 사회.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 아닐까요.
건강한 삶이란, 담대하게 버텨낸다는 것
100세 시대라고 하죠. 하지만 우리가 자립해서 살아가는 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을 우린 정상성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요. 아픈 삶이 마치 비정상인 것처럼 여기죠.
건강한 삶이란 뭘까요. 병도 아픔도 없는 삶? 세상에 그런 삶은 없어요. 얼마든지 아플 수 있고, 좌절할 수 있고, 장애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최대한 담대하게 버텨내는 삶이야말로 건강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매 순간 후회 없이 지내는 삶이요.
저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냐고요? 아뇨. 후회가 되는 부분도 있고, 아쉬운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잖아요. 생각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가끔 사람들이 물어봐요. 고액 연봉 받는 다른 의사들 부럽지 않냐고. 왜 안 부럽겠어요. 저도 사람인데. 하지만 늘 결론은 같아요. 그건 제 길이 아니었다고. 지금은 병원을 유지할 정도는 돼서 다행이에요. 그거면 된 거죠.
제가 하고 있는 모든 경험은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죽음을 앞둔 환자를 만나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 맞이하고, 가끔은 기적처럼 몇 달을 더 사는 모습을 보는 것. 이런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오늘도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의 핸드폰은 이른 아침에도, 어둑한 새벽에도 울립니다. 모든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당부했거든요. 사소한 상황이라도 괜찮으니,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인터뷰 중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 후,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죠. 문득, 그가 쓴 책 속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계속해서 아픈 이들을 만날 작정이다. 건강을 강요하지도, 약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그들과 함께하면서 마음이 시키는 소리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아픈 이들과 소통하다 보면, 언젠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작은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_홍종원, 『처방전 없음』 28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