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영 책수선 : 파손의 흔적은 책의 쓸모를 보여준다, 사람도 그렇다


롱블랙 프렌즈 B 

여러분은 수십 년을 아끼는 책이 있으신가요. 이사를 하고 책장을 정리하면서도 절대 버리지 않는 책, 가끔씩 펼쳐보며 옛 생각이 나는 그런 책이요.

제겐 『월간 디자인』 2002년 11월호가 그런 책입니다. 당시 처음 열렸던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의 이야기가 담겼죠. 학생이었던 제게 ‘좋은 디자인을 보는 즐거움’을 처음 깨닫게 해줬습니다. 많이 닳고 찢어졌지만, 지금도 가끔씩 펼쳐봅니다. 그때의 설렘을 느끼고 싶으니까요.

책 수선가는 이런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망가진 책의 흔적을 더듬고,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도록 그 쓸모를 복원하죠. 18세기 유럽의 고서부터 70년의 기록을 담은 할머니의 일기장까지, 가리지 않고 책을 수선합니다.

4월 23일 오늘은 세계 책의 날입니다. 망가진 책을 수선해 기억을 되살리는 책 수선가 재영 씨를, 김승우 팀장이 만나고 왔습니다.


김승우 아이에프컨설팅 팀장

연남동의 연립주택 골목 틈사이, 15평의 아담한 작업실에 다녀왔습니다. 작업실을 꽉 채운 스테인레스 작업대는 수술 집도실을 연상케해요. 책등을 두드리는 망치, 미세한 흠집을 살피는 현미경, 이물질을 걷어내는 핀셋, 책을 눌러 고정시키는 프레스, 그림을 덧칠하는 색연필과 의료용 붕대까지. 다양한 수선 도구가 가지런히 놓여있죠.

재영 책수선. 9년 경력의 책 수선가 재영 씨의 이름을 건 책 수선집입니다. 있을 재, 물맑을 영. ‘물과 풀이 넘실대는 좋은 환경에 네가 있어라’는 한자 뜻풀이를 빌렸죠. 책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합니다. 거친 삶을 산 책에, 잠시 머물며 치료받다 가라고 다독이는 겁니다.

재영 씨는 국내에 보기 드문 책 수선가입니다. 찢어지거나 변색된 책을 말끔히 고치는 일을 하죠. 찢어진 종이는 접착제와 붓을 이용해 붙입니다. 실매듭을 풀고 새로 제본하고, 새 표지를 장착하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