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유독 수식어가 많은 계절이지만 음악과 독서가 대표적으로 떠오르곤 해요.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관련 페스티벌도 활발히 개최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대표적인 가을 페스티벌이 된 이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서울숲재즈페스티벌 : 내향인들을 위한 가을 페스티벌

2015년에 홍원근 대표는 페이지터너를 설립했습니다. 그 무렵의 홍 대표에게, 재즈 시장은 블루오션처럼 보였다고 해요.
당시 전체 음악 시장에서 재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2%. 그럼에도 실력있는 뮤지션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감각과 기술이 모두 탁월한 뮤지션들이었죠.
가능성은 분명하지만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대요. 이 시장을 바로 10%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언젠가 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우리는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늘리는 게 목표다.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을 설득하지 않는다.’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찾고 늘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사람을 늘리고 싶은 마음. 서울숲재즈페스티벌로 이어집니다. 더 규모 있는 행사를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성동구청과 인연이 생겼거든요. 함께 열었던 재즈 음악회가 반응이 참 좋았고, 다음 행사 아이디어를 논의하던 자리였죠.
원래 야외 축제를 생각하지 않았던 홍원근 대표.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대요. “서울숲에서 재즈 공연을 하면 어떨까요?” 첫 회의를 마치자마자 홍 대표는 도메인부터 샀어요. seoulforestjazz.com. 어떤 일은 운명처럼, 급작스럽게 진행되곤 합니다.
재즈 페스티벌을 연 건 페이지터너가 처음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2004년 시작한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2008년 출발한 서울 재즈 페스티벌이 있었죠. 두 페스티벌은 지금도 규모가 훨씬 커요.
달라야 했어요. 무대부터 관객까지 모두요. 홍원근 대표는 우선 심볼과 포스터를 공들여 만듭니다. 그게 브랜딩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대요.

2017년, 제1회 서울숲재즈페스티벌의 포스터를 볼까요. 고즈넉한 느낌의 사진이 포스터를 가득 채웁니다. 새벽녘의 짙푸른 하늘, 울창한 숲 사이로 어슴푸레 아침 햇빛이 새어 나와요. 이 감성적인 사진 위엔 사슴 모양의 심볼이 그려져 있어요. 그리고선 행사명과 장소, 그리고 시간.
그게 다였어요. 누가 주관하는지 밝히지 않았죠. 재즈 행사지만 그 흔한 색소폰도, 음표 이미지도 없었어요. 그 위에 얹은 건 한 줄의 슬로건입니다. ‘자연과 음악, 그리고 사랑Nature, music & Love.’
“풍경을 상상했어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잔디밭에 앉아서 편안하게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요.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감성을 좋아할까 고민했죠. 그걸 포스터에 녹이려고 노력했어요."
이 포스터 한 장으로 첫 해 축제에 4000명이 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신기하게 서로 닮았어요. MBTI로 따지면 I, 그러니까 내향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페스티벌은 만드는 팀의 색깔이 120% 묻어나요. 그 팀이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축제의 풍경이 결정되죠. 물 뿌리며 노는 강렬한 축제를 저희가 기획하진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딱 우리 같은 사람들이 페스티벌에 모이는 거죠.”
서울숲재즈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전 세대가 재즈를 즐기는 것을 꿈꾸는 홍원근 대표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직접 읽어보세요!

언리미티드 에디션 : 독립 출판계를 살리는 가을 페스티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도 하죠. 책에 대한 이야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행사가 있습니다. 독립출판계의 최대 축제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이하 언리밋)입니다.
행사를 기획한 이로 대표는 1세대 독립서점 기획자로 불립니다. 국어국문과를 나와 신춘문예, 문예지 공모에서 번번이 낙방했어요. 그는 늘 등단하지 않아도 되는 문학을 꿈꿔왔죠.
“고민했어요. 내가 쓴 창작물을 발표할 방법이, 등단과 대형출판사 말고는 없는 건가? 이런 고민을 저만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디자이너들도 회사를 위한 작업에 질려,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책으로 만들고 있었죠. 전문적인 텍스트나 추천사가 없는 자유분방한 책을요.”
2000년대 중반, 독립출판과 독립서점 붐이 함께 찾아옵니다. 적게 벌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이들이 늘었어요. 또 적은 돈으로 취향을 사겠다는 흐름도 생겼죠.
이로 대표도 흐름에 올라탔습니다. 2009년 독립출판물만 유통하는 온라인 서점 ‘유어마인드’를 만들었어요. 웹사이트를 열고 프리랜서 작가, 디자이너가 만든 독립출판물 100여 종을 팔았죠.
이로 대표가 오프라인 판매를 고민한 건 1년쯤 버텼을 때입니다. 안 팔렸거든요. 하루 매출이 한 푼도 없을 때도 있었죠. 이름 없는 출판사와 작가가 낸 책을 읽지도 않고 살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북 페어book fair를 열겠다고 결심한 건 그래서예요. 이로 대표는 생각했어요. 책을 사고 파는 시끌벅적한 시장이 있다면? 책 제작자가 직접 상인이 돼 책을 만든 과정을 소개할 수 있다면? 서점에 잠들어있던 책이 살아 숨 쉴 것 같았죠.
이로 대표는 10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첫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먼저 참가자를 모았어요. 홍대 인근에서 열리는 프리랜서 작가들의 책·미술품 전시장을 찾아다니면서요.
“독립출판 제작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응했어요. 지금까지 땀 흘려 만든 책을 홍보할 방법이 없었다면서요.”

2009년 12월, 홍대 인근 지하 갤러리 30평 공간에 독립출판사 30팀이 모였습니다. 잡지사, 그래픽 디자이너, 소규모 출판업자들이 홍보를 도와줬어요. 하루 300명씩, 사흘 동안 900명이 찾아와 갤러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한정판을 의미하는 리미티드 에디션Limited Edition에 부정의 언Un을 붙였어요. 독립출판물 각각의 부수는 아주 적지만, 행사에 온 순간만큼은 누구든,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는 뜻을 품었죠.”
2019년, 관람객은 10년 만에 25배가 늘었어요. 언리밋은 독립출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키웠습니다. 크고 작은 독립출판 행사들, KT&G 상상마당의 ‘어바웃북스’, 세종예술시장 ‘소소’의 독립출판 플리마켓, 국립 중앙 도서관의 ‘독립출판 특별전’이 언리밋 이후 쏟아져 나왔습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독립출판에 대한 장벽을 허무는 이로 대표의 이야기를 아래 링크에서 더 자세히 만나보세요!

자라섬재즈페스티벌 : 재즈 불모지에 재즈를 불러온 가을 페스티벌

인재진 총감독은 2004년,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을 처음 기획했습니다.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페스티벌 이름과 티켓 가격을 두고 가평군과 이견이 있었어요. 처음 나왔던 이름은 ‘가평재즈페스티벌’. 가평을 알려야 한다는 거였죠. 강력하게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라섬이 가평 안에 있으니, 가평은 자연스럽게 홍보될 거라고 설득했죠.
공무원들은 ‘티켓을 판다’는 개념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당시 지방자치단체 행사는 대부분 입장료를 받지 않았거든요. “축제가 이어지려면 반드시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해서 상징적인 1만원의 입장료를 받아냈습니다.
처음 자라섬에는 무대를 설치할 평지도, 잔디밭도, 주차 공간도, 전기도 수도도 없었어요. 두 달 안에 우리가 다 만들어야 했죠. 잔디는 자라는 속도가 느려 1회 때는 호밀을 사다 심기도 했어요. 스태프 10명으론 모자라, 공무원들까지 나서 공연장을 만들었죠.
아티스트도 끌어모았습니다. 그의 아내인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도움이 컸어요. 12팀 170여 명의 아티스트를 초청했어요.
처음 자라섬에는 무대를 설치할 평지도, 잔디밭도, 주차 공간도, 전기도 수도도 없었어요. 두 달 안에 우리가 다 만들어야 했죠. 잔디는 자라는 속도가 느려 1회 때는 호밀을 사다 심기도 했어요. 스태프 10명으론 모자라, 공무원들까지 나서 공연장을 만들었죠.

그렇게 2004년 9월 10일. 1회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이 막을 올렸습니다. 첫 회인데도 나흘간 약 3만 명이 자라섬을 찾았어요. 초가을 푸른 초원 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음악을 듣는 가족, 연인, 친구들… 그가 꿈꾸던 재즈 축제 그대로였어요.
그런데 둘째 날부터 지옥이 펼쳐졌습니다. 폭우가 쏟아진 겁니다. 북한강 수위가 오르면서 사방이 물천지로 변했어요. 사람들은 도망치듯 빠져나갔고, 음향 장비가 물에 잠겨 감전 사고가 났어요. 어찌나 미숙했던지 무대에 지붕도 없었던 거예요. 화가 난 사람들은 너도나도 총감독을 찾기 시작했죠. 숙박료와 교통비까지 물어내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는 비난을 고스란히 받으며 상황을 수습했습니다. 둘째 날 행사를 모두 취소하고 삽을 들고 진창을 복구했어요. 모래를 뿌려 물웅덩이를 메우고, 무대 앞에 의자를 배치했어요. 조금씩 사람들의 화가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죠. 무대에 임시 천막을 치고 이튿날 오후에 공연을 재개했어요. 3000명의 관객이 남아 줬어요.
여전히 비가 내렸지만 분위기는 전날과 달랐습니다. 특히 피아니스트 디디 잭슨D.D. Jackson의 열정적인 연주가 분위기를 달궜어요. 거세지는 빗줄기만큼이나 힘차게 건반을 쳐댔죠. 관객들은 다시 환호해 줬어요. 관객과 스태프가 하나 돼, 기차 행렬을 만들어 뛰어놀기 시작했습니다. 무대 위 아티스트도, 인 감독도 그들 속에 섞여 들어가 춤추듯 뛰었어요.
그때 3000명이 낸 입소문 덕분인지, 2회 때는 관객 7만명이 찾았어요. 3회에는 가평군 예산 지원도 늘고 스폰서 기업도 늘었죠. 5회 때부터는 수익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야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이 대표적인 가을 페스티벌로 자리 잡았지만 원래 그는 기획자로선 '마이너스의 손'이었다고 해요. 자라섬재즈페스티벌로 기획자 커리어의 전환점을 맞은 그의 이야기를 아래 링크에서 더 자세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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