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태희 : 카페 이페메라, 한아조, 두수고방의 공간을 완성한 미완의 철학

오설록 제주 티뮤지엄, 패션 브랜드 르메르의 한남동 플래그십 스토어, 수제비누 브랜드 한아조의 북촌 쇼룸, 그리고 디저트숍 카라멜리에오까지.
임태희 소장의 전문 분야는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상업공간이에요. 하지만 그가 완성해낸 공간에는 오래도록 질리지 않는 힘이 있어요.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인’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임태희 소장이 프로젝트를 마칠 때면,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대요. “끝난 게 맞느냐”고. 임 소장에겐 최고의 칭찬이라고 해요.

본질. 임태희 소장이 천착하는 본질이란 ‘순수함’, ‘검박함’ 입니다. 상업적인 공간을 주로 디자인하는 그가, 왜 이런 가치들에 주목할까요?
“요즘 한국 카페들의 유효기간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6개월도 채 안 돼요.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은 많아도, 자주 가고 싶은 곳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일을 할수록 지속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본질이 깃든 공간을 만들면 사람들이 기꺼이 쉬다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저에게 있습니다.”
_임태희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 소장, 롱블랙 인터뷰에서
그런 기대를 담아 설계한 곳이 성수동 LCDC의 1층 카페, 이페메라Ephemera예요.

성수동 LCDC 1층에 위치한 카페 이페메라. 임태희 소장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래도록, 자주 들르길 바라며 내부 공간을 설계했다. ⓒ카페 이페메라 인스타그램
LCDC 총괄 기획을 맡은 김재원 아틀리에 에크리튜 대표가, 임태희 소장에게 설계를 의뢰했어요.
이페메라*. 임 소장은 이 프로젝트를 하며, 처음 이 단어를 알게 됐다고 해요. ‘특정 기간에 특정 목표로 만들어진 지류’를 뜻합니다. 우표, 티켓, 전단지 등이 있어요. 이페메라에게서 임 소장은 ‘무용함’이란 본질을 읽어냈어요.
*어원이 되는 ephemeral은 ‘수명이 짧다’는 뜻이다.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무용해진 것들. 그 ‘무용함’이란 가치가 저는 너무 좋았어요. 이페메라가 저에게 커다란 힌트가 돼 줬다고 할까요.
성수동은 힙함의 성지잖아요. 힙하고 트렌디하고 좋지만, ‘아, 뭔가 진짜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느낌이 들때도 많아요. 트렌드의 성지에서 한번 반(反) 트렌드를 해봐야겠다, 생각했죠.”

이페메라를 어떻게 잘 보여줄 것인가에 집중했습니다. 이제는 효용 가치가 떨어진, 유행과 거리가 먼 사물들. 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했어요. 임 소장과 팀원들은 액자 하나하나를 디자인했어요. 300여개가 넘는 나무 액자는, 수종과 프레임의 두께, 배경 색지가 전부 달라요. 또 어떤 액자는 단단하게 붙어있고, 어떤 건 붕 떠서 걸려있어요.
“소위 또라이 같은 짓을 한 거예요. 액자 마다 각도를 다 다르게 고민했어요. 발견의 재미를 느끼시길 바랐죠.
처음엔 그냥 우드톤의 너무나 편안한 공간. 그 다음엔 ‘가구 잘 만들었네?’ 그 다음엔, ‘와 이 액자 하나하나 다른 것 좀 봐.’ ‘누가 이 미친 짓을 한 거지?’, 오면 올수록 발견할 거리가 많은 곳이 되길 바랐습니다.”
임태희 소장은 이페메라가 ‘지속가능함에 대한 실험’이었다고 말합니다.
“이페메라가 10년 이상 버텨주길 바라고 있어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남아주길. 본질에 충실하지만,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는 클래식처럼.”
임 소장이 추구하는 순수함과 검박함이라는 본질은, 그가 디자인한 두수고방과 한아조 쇼룸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롱블랙 아티클에서 임 소장의 디자인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더 읽어보세요!

2. 에리어플러스 : 블루보틀・밍글스를 디자인한 스튜디오, 한국적인 공간 기획법

에리어플러스는 올해로 꼭 9년이 된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겸 공방입니다. 블루보틀 한남부터 여의도, 광화문, 잠실점을 모두 디자인했어요. 여기에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인 밍글스와 소설한남, 한식구의 설계도 맡았죠.
블루보틀 광화문점을 잠시 들여다볼까요. 투명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펼쳐지는 새하얀 벽과 상아색 바닥, 공간 한가운데에 놓인 ㅁ자 회색 스틸 카운터가 편안한 인상입니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또 다른 볼거리가 생깁니다. 매장에 들어온 손님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걸으며 주문하는 장면이에요. 그 모습이 창밖 청계천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과 겹치죠. 그 순간 매장은 ‘청계천이 이어진 공간’으로 느껴집니다.
에리어플러스가 블루보틀의 매장을 처음 맡은 건 2020년 문을 연 한남점이었습니다. 블루보틀 매장은 주로 미국 본사나 일본 디자이너가 설계하곤 했대요.
한국의 디자인 스튜디오와 작업을 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어요. 블루보틀 담당자는 “초기 작업부터 쭉 지켜봤다”고 말하더래요.
블루보틀이 원하는 콘셉트는 명확했어요. 매장이 들어설 지역의 특징을 인테리어에 담아달란 거였죠. 특별한 가이드나 주의사항도 없었어요. 그저 “에리어플러스가 해석할 블루보틀이 궁금하다”는 게 다였습니다.=
그래서 에리어플러스는 ‘지역의 역사와 특징’부터 공부했습니다. 마치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탐험가처럼요.
“여행을 떠난다고 상상해볼까요. 여행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동네엔 어떤 사람들이 모여 살까?’ ‘어떤 역사가 있을까?’ 같은 순수한 호기심이 동네의 매력을 파헤치게 만들죠.”
_유일선 에리어플러스 대표, 롱블랙 인터뷰에서
에리어플러스가 디자인한 블루보틀 매장의 공통점은, 지역의 매력을 한두 가지로 압축해 표현한단 겁니다.
한남점을 볼까요? 뒤로는 남산을, 앞엔 한강을 둔 한남동의 매력을 살렸어요. 공예가의 옻칠로 거친 질감을 살린 회색 벽은, 산자락의 바위처럼 시원하고 웅장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천장에 알알이 박힌 조명이죠.

“조명은 일렁이는 한강에 햇빛이 반사될 때 보이는 윤슬을 표현했어요. 한남동의 매력은, 원하면 언제든 한강을 찾을 수 있는 생활 환경이라 생각했거든요. 동네 주민이 자주 봤을 한강의 모습을 매장에도 그대로 녹였죠.”
_김융희 에리어플러스 실장
청계천에 위치한 광화문점은 ‘방문객의 움직임’까지 지역의 특색에 맞게 설계했습니다. 메뉴를 주문하려면 카운터를 따라 가로로 움직여야 해요. 이런 움직임은 청계천 물이 흐르는 방향, 천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이 걷는 방향과 똑같죠.
“도시인의 쉼터가 된 청계천과 매장을 굳이 분리할 필요가 없었어요. 청계천 물과 사람의 움직임을 통창으로 시원하게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매장에서 걷는 흐름도 청계천과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죠.”
_김융희 에리어플러스 실장
김융희 실장은 말합니다. 가득 채우기보다 ‘알맞게 비우는 공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요.
“지역의 매력을 녹이면, 그것이 곧 한국적인 매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꼭 화려하거나 웅장한 건축 양식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지역의 일상을 상상하게 할 한두 가지의 포인트만 갖고도 ‘특색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_김융희 에리어플러스 실장
에리어플러스만의 무기는 또 있습니다. 스튜디오에 디자이너와 공예 작가가 함께 일한다는 건데요. 서울과 경기에 나무부터 도자, 금속까지 무려 세 개의 공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공간에 들어갈 식기부터 화병, 심지어 휴지 케이스도 작가들이 빚어낸다고 합니다.

조금 집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에리어플러스는 왜 공간과 집기를 함께 디자인할까요? 그건 바로 ‘일체감’ 때문입니다. 진한 월넛 나무 식탁 위에 ‘빨강 플라스틱 컵’이 놓이면 분위기를 흩트려 놓을 테니까요.
집요한 철학을 통해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을 디자인하는 에리어플러스의 이야기를 롱블랙에서 더 읽어보세요!

3. 디자이너 양태오 : 세계 100대 디자이너, 전통으로 미래를 그려내다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100대 스튜디오 ‘AD100’에 포함된 ‘태오양 스튜디오’. 이를 운영하는 양태오 디자이너를 만났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뉴욕 아트 서적 중 하나
그는 여러 채의 한옥 공간을 디자인했고, 국립경주박물관을 리모델링했습니다. 자신의 화장품·가구·향 브랜드를 론칭했어요. 파이돈 프레스는 그의 작품을 두고 “과거를 현재로 옮기는 데 탁월하다”고 표현했죠. 그는 한국의 전통을 현대의 공간에 가장 잘 구현하는 디자이너입니다.
2020년, 양태오 디자이너는 국립경주박물관 로비 리모델링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을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유물을 만나는 곳’으로 만들었어요.
유물을 유물관에서 꺼내 로비에 전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유리관을 없앴거든요. “박물관의 지향점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기획을 시작할 때 시나리오부터 짜요. ‘어떻게 초대받아서 어느 길을 통해서 오지?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걸 경험하고 어떤 로비를 걸어야 하지?’ 같은 동선을 생각해요. 박물관은 사실, 유물 사진을 찍고 싶어서 오는 곳이죠.”
_양태오 태오양 스튜디오 소장, 롱블랙 인터뷰에서
사진을 더 즐겁게 찍으려면? 유물과의 거리가 가까워야 했습니다. 유리관을 없애자고 하자 반대가 많았죠. 누가 유물을 만지기라도 하면 어쩌냐고요.
양태오는 대신 탄소 저감 장치, 대리석 받침, 대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안전 거리와 보존 환경을 확보했어요. 지금까지도 유물은 한 번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유물을 지키는 게 유리관이 아닌 관람객이 됐기 때문이에요.
스튜디오 직원들이 2~3일 동안 박물관에 머물며 관객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관객들이 계속 길을 묻더군요. 이동 동선을 모르는 게 문제였습니다. 양태오는 유물관 안에 창을 내서 지금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고, 리프레시를 통해 전시를 끝까지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국립경주박물관 리모델링은 단 두 달 만에, 직원 여섯 명이 이뤄낸 일입니다. 미국 타임지는 ‘2021 세계 100대 명소’로 경주를 선정하면서 특히 국립경주박물관에 꼭 가보라고 소개했죠.
“서울공예박물관 전 관장님이 저한테 그러셨어요. ‘태오 씨, 경주박물관은 디자인이 예쁜 걸 떠나서 제 의식에 큰 충격을 줬어요. 우리도 바뀌어야 한다는 위압감을 느끼게 했어요.’”
국립경주박물관이 바뀐 뒤, 많은 박물관이 리노베이션에 들어갔습니다.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사유의 방’을 공개했습니다. 같은 해 ‘전통을 핫플레이스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서울공예박물관이 문을 열었고요.

양태오의 작업은 하나의 카테고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박물관, 레지던스, 브랜드… 최근에는 카페 브랜딩과 기업 오피스 컨설팅을 맡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들은 모두 ‘미래의 가이드라인을 잡는다’는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GS에너지 오피스를 만들 때는 ‘에너지’의 가이드라인을 재정의했어요. 석유·석탄이 아니라 사람과 소통이 에너지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없애고 그 자리에 계단을 만들었어요.
동탄의 엘레먼트 바이 엔제리너스A’LEMENT BY ANGEL-IN-US 프로젝트 때는 ‘엔제리너스’라는 이름을 되살렸어요. 진짜 지역에 천사 같은 존재가 돼주냐는 거죠.
엔제리너스 엘레먼트 매장은 피클, 열무 같은 식자재 수급을 동탄과 수원에서만 해요. 테이블을 둬야 할 자리에 동탄의 아티스트 작품을 전시하고요. 이런 게 다 미래에 대한 대비죠. 현재에서 미래로 확장성을 가지는 거예요.”
이처럼 양태오 디자이너는 전통을 현대에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전통이 살아남을 미래까지 생각합니다. 미래의 공간이, 미래의 생활방식이 어때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요. 이를 위해 공간 디자인을 넘어 브랜드를 론칭하고, 공공사업까지 기획해온 거죠.

양태오 디자이너의 더 많은 작업과 그 안에 담긴 디자인 철학이 궁금하다면, 롱블랙에서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