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의 발견 5부 : 자기결정력이 사라진 시대, 야마구치 슈의 ‘인생 경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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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블랙 프렌즈 K 

이직할까, 지금 회사에 남을까. 서울에 계속 살까, 다른 도시로 떠날까, 아니면 아예 다른 나라에서 살아볼까.

일과 커리어의 선택지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검색과 AI는 몇 초 만에 수많은 답을 내놓지만, ‘그래서 나는 뭘 고를까’는 여전히 어렵죠.

그래서 이번 「심플의 발견」 5부에선 ‘일 때문에 복잡해진 삶’을 다루는 법을 물었습니다.

선택지가 넘치는 시대, 어떻게 하면 심플하게 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들고, 일본을 대표하는 전략 컨설턴트이자 철학자 야마구치 슈山口周를 화상으로 만났습니다.


야마구치 슈 사상가·경영 컨설턴트 

야마구치 슈는 철학과 미학을 공부한 뒤 일본 최대 광고 회사 덴츠DENTSU와 보스턴컨설팅그룹(BCG), AT커니를 거친 경영 전략가입니다.

그는 오래도록 “우리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뉴타입의 시대』에선 문제 해결보다 문제 발견이 중요해진다고 했고, 『비즈니스의 미래』에선 성장 중심 시대가 끝난 뒤의 일을 고민했어요.

야마구치 슈가 보는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요. 그는 “아노미, 곧 규범이 해체된 시대”라고 답합니다. “이렇게 살면 된다”는 답이 흐려지고, 선택은 각자의 몫이 됐다는 거예요.

이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복잡하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야마구치는 “원칙principle이 있다면 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저한테 심플하다는 건 판단 기준, 원칙이 있다는 뜻이에요. 우선순위가 명확하니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대엔 나만의 원칙을 세우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거예요.


Chapter 1.
선택지는 너무 많은데 답은 하나인 세상

야마구치는 지금의 복잡함을 이해하기 위해, “100년 전 삶을 떠올려보자”고 했어요.

“예전에는 태어난 곳에서 평생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면 그 공동체 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규범이 공유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시로 이동했고, 인터넷과 비행기로 전 세계와 연결됐죠. 자연히 완전히 다른 가치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무엇을 기준 삼아 살아야 할지 점점 보이지 않게 된 겁니다.”

물론 장점도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자유로워졌으니까요. 어디에서 살지, 무슨 일을 할지, 누구와 살아갈지 직접 고를 수 있게 됐어요. 문제는 선택의 책임도 함께 넘어왔다는 겁니다.

야마구치는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인용했어요. 인간은 자유를 얻은 대가로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부담을 함께 지게 됐다는 내용이죠.

“‘당신이 자유롭게 결정하세요’라고 했을 때 오히려 문제가 생깁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하지?’ 혼란스러운 거죠. 그래서 자유로울수록 ‘이걸 따르면 틀리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더 생깁니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해졌는데, 사회가 말하는 ‘좋은 삶’의 모습은 오히려 하나로 좁혀졌어요. 좋은 학교에 들어간다,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 회사에서 활약한다, 높은 보수를 받는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익숙한 성공 공식이죠.

야마구치는 이 성공 공식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어요.

“첫째, 실제로 그 길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다른 형태의 성공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면, 마치 패자의 자기 위안처럼 보이기 쉽죠.

둘째, 실제로 사회에서 활약하고 어느 정도 돈을 버는 사람도 ‘그래서 이게 정말 좋은 건가?’라고 묻습니다. 스트레스도 크고, ‘이게 정말 내가 살고 싶었던 인생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러니 익숙한 성공 공식을 믿고 따르기도, 그렇다고 다른 길을 고르기도 어렵습니다.

“분명 다른 방식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어떤 삶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혼란스럽고, 복잡한 겁니다.”

사상가이자 경영 컨설턴트인 야마구치 슈. 그는 지금을 ‘규범이 해체된 시대’라고 말한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무엇을 기준으로 고를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야마구치 슈

Chapter 2.
‘자기결정’은 머리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에게 맞는 삶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야마구치는 “‘자기결정自己決定’이 중요하다”고 답했어요. 남의 평가나 기대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감각을 기준으로 선택하는 겁니다.

“‘이 회사에 가면 사람들이 부러워하겠지’, ‘이 학교에 가면 부모님이 좋아하시겠지’라는 건 머리로 계산하는 겁니다. 결정한 사람은 나지만, 판단의 기준은 여전히 바깥에 있죠.

반대로 ‘이건 정말 해보고 싶다’, ‘생각만 해도 설렌다’, ‘너무 재미있어 보인다’는 감각은 마음에서 오죠. 그런 감각을 따라 결정해야 ‘자기결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만든 욕망조차 내 욕망이라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요. 알고리즘이 취향까지 먼저 추천해 주는 지금은 더 그렇고요.

야마구치 또한 그랬습니다. 그의 첫 직장은 광고 회사 덴츠였어요. 음악과 영상을 좋아했던 그에게 광고 일은 매력적이었어요. 게다가 덴츠는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회사였죠. 자신의 관심과 사회적 선망이 겹치면서, 덴츠는 그에게 ‘꿈의 회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그렇게 즐겁지가 않았어요.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인데도요. 이후 컨설팅회사에 갔을 때 ‘이 일은 나한테 잘 맞는구나’라는 걸 굉장히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훨씬 즐겁게 일했거든요.”

그토록 원했던 마음이 정말 자기 것이었는지는, 결국 해보고 나서야 보였습니다.

직업만이 아니었습니다. 야마구치는 젊은 시절부터 좋은 스포츠카를 갖고 싶어 했어요. 많은 사람이 선망하고, 성공의 상징처럼 여기는 차였죠. 마침내 살 형편이 되자 손에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기분이 올라가요. 그런데 흥분은 몇 달 가지 않더라고요. 그러고 나니 ‘내가 정말 이 차를 원했었던 건지, 아니면 모두가 원하고 성공의 상징이라고 하니까 갖고 싶었던 건지’가 보이기 시작했죠.”

그럼, 진짜 내 욕망인지 아닌지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야마구치의 답은 단순했습니다. “직접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고요.

“진짜 내 욕망과 외부에서 주어진 욕망을 미리 완벽하게 구별하려 애쓰지 마세요. 어차피 해보기 전까지는 모릅니다. 일해보고, 가져보고, 만나보는 거예요. 농구를 해보지도 않고 ‘내가 농구를 잘할까, 좋아할까’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아요.

일단 해보는 겁니다. 그런 다음, 처음의 설렘이 가라앉은 뒤에도 여전히 즐거운지를 보는 거죠.

특히 젊을수록 판단보다 경험을 더 많이 해봐야 합니다. 심플하게 살겠다며 가능성을 너무 빨리 잘라내면 오히려 나를 알아갈 기회를 잃을 수 있습니다.”

야마구치의 첫 직장은 광고 회사 ‘덴츠’였다. 그는 꿈의 직장이었던 덴츠를 나와 컨설팅 회사에 들어간 후에야,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찾을 수 있었다. ⓒdentsu

Chapter 3.
모든 걸 붙잡으려 하면, 중요한 게 빠져나간다

경험을 쌓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게 조금씩 보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문제가 생겨요. 내가 좋아하는 게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도 잘하고 싶고, 가족과 시간도 많이 보내고 싶습니다. 돈도 벌고 싶고, 새로운 경험도 하고 싶죠. 문제는 이 모든 데 쓸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돼 있다는 겁니다.

야마구치는 바로 이때 원칙principle, 즉 ‘무엇을 더 중요하게 둘지 정해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인간의 뇌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요. 생각할 수 있는 힘도, 판단에 쓸 수 있는 시간도 한정돼 있죠. 그런데 판단 기준이 늘 있고 우선순위가 명확하면 ‘이걸 할까 말까’, ‘뭘 먼저 할까’를 결정하는 데 시간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야마구치는 그래서 자신의 삶이 심플하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일을 해도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으니 판단 과정이 복잡하지 않다는 뜻이었어요.

그럼 야마구치는 실제로 무엇을 우선해야 한다고 볼까요. 그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예로 들었어요.

회사 일은 많이 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대신 그만큼 아이와 놀아줄 시간은 사라지죠. 야마구치는 이때 되돌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생 후반에 돌아봤을 때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다는 기억과, 아이와 함께 즐겁게 놀았다는 기억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요. 저는 회사에서 열심히 했다는 건 그렇게 큰 추억으로 남지 않을 것 같아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되돌릴 수 없잖아요. 한 살 때의 시간은 두 살이 된 뒤에는 다시 가져올 수 없습니다. 우선순위를 잘못 잡으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걸 얻으려고 돌이킬 수 없는 걸 잃게 되는 거죠.”

그는 실제로 인간관계에서 같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알아두면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자리에 안 나가면 기회를 놓치지 않을까’ 생각하며 업무상 관계를 끝없이 늘리곤 하죠. 하지만 야마구치는 “그런 가능성까지 모두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저는 일을 위해 사람을 사귀는 일이 거의 없어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굳이 만나지 않습니다. 업무상 꼭 만나야 한다면 필요한 만큼만 만나고요. 그런 관계가 있어야만 들어오는 일이라면, 그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기회가 될지 모르는 관계보다, 지금 함께 있고 싶은 사람에게 시간을 쓰겠단 겁니다. 뭔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건 결국 다른 뭔가를 포기한다는 뜻이니까요.

“자기 나름의 가치가 있어야 해요.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든 나는 이것을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는 기준이요. 삶이 복잡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 기준이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서로 충돌하니까, 매번 ‘이번엔 어느 쪽을 택해야 하지?’ 고민하는 거죠.

심플하게 산다는 건 결국 자기만의 원칙을 갖는 겁니다. 그래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놓을지를 판단할 수 있어요.”

야마구치는 전략 컨설팅 그룹 보스턴컨설팅 세계 1위 경영 인사 컨설팅 그룹인 콘페리헤이그룹 등의 커리어를 거친 경영 전략가다. 그는 “‘원칙’이 있어야 삶이 일의 복잡함에 휩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위즈덤하우스, 흐름출판

Chapter 4.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 중요하다 

삶에서 무엇을 할지 정하는 원칙이 필요했다면, 일에선 어떤 문제를 풀지 정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야마구치는 “AI 시대에 이 힘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했어요.

그는 컨설팅 업계를 예로 들었죠. 

컨설턴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료 수집이 아닙니다. ‘지금 이 회사가 풀어야 할 진짜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해야 해요. 야마구치는 이를 “아젠다Agenda를 세운다”고 표현했어요.

자동차를 예로 들어볼까요. 모두가 “전기차는 한 번 충전하면 긴 거리를 달려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도시에서 자동차를 타는 사람 대부분이 하루 30㎞도 달리지 않는다면, 주행거리를 무작정 늘리는 게 정말 가장 중요한 문제일까요. ‘실제로는 100~200㎞만 충전해도 충분하지 않을까?’라고 묻는 것. 바로 이게 아젠다입니다.

AI가 바꾸고 있는 건 그다음입니다. 전통적인 컨설팅회사에선 파트너나 상위 직급이 아젠다와 가설을 세우고, 젊은 컨설턴트들이 자료를 찾고 분석해 문서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AI가 조사와 분석, 문서 작성을 대신하면서, 컨설팅회사들이 젊은 인력을 줄이고 있죠.

반대로 아젠다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AI를 더 강력하게 쓸 수 있어요.

“AI는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그게 정말 맞나? 혹시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새로운 아젠다를 세우는 일을 잘 못합니다. 반면 그다음의 정보 수집이나 분석, 문서 작성은 굉장히 잘하죠. 그래서 아젠다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AI 때문에 오히려 생산성이 훨씬 높아질 겁니다.”

AI가 답을 만드는 속도는 빨라졌다. 야마구치는 “이제 ‘무엇을 물을 것인가’를 정하는 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ChatGPT, Cluade, Gemini

당연함이 깨지는 곳으로 가라

그럼 좋은 아젠다는 어떻게 발견할까요. 다시 물었습니다. 야마구치는 “내게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곳을 봐야 한다”고 했어요.

일본에서는 집마다 세탁기를 한 대씩 두는 게 자연스러워요. 한국도 비슷하죠. 그런데 야마구치가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본 공동주택은 달랐어요. 집 안에 세탁기를 두지 않고 건물의 공동 세탁실을 사용했습니다. 여러 대의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고, 옆에는 커피 머신도 있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공간이 됐죠.

그 장면을 보고 나면 이전엔 하지 않았던 질문이 생깁니다. ‘세탁기는 왜 꼭 집마다 한 대씩 있어야 하지?’ 익숙한 답이 유일한 답이 아니라는 걸 보는 순간, 질문이 생깁니다.

“일본 안에서 일본의 일상만 보고 있으면 ‘왜 이렇게 되어 있을까’, ‘왜 다른 방식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한국이든 미국이든 유럽이든, 다른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는 감각이 필요해요. 일종의 문화인류학적 관찰자의 감각이죠. 그런 감각이 있어야 아젠다를 발견하기 쉽습니다.”

스웨덴 공동주택의 세탁실 예약 보드. 집마다 세탁기를 두는 한국·일본과 달리, 공동 세탁실을 함께 쓰는 문화가 있다. 야마구치는 “익숙한 생활 방식이 뒤집히는 장면에서 새로운 아젠다가 생긴다”고 말한다.ⓒWolfgangus Mozart / Wikimedia Commons

Chapter 5.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

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눈 뒤,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복잡한 시대에 삶을 조금 더 심플하게 만들고 싶다면, 무엇부터 생각하면 좋을까요.

야마구치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어요. 그가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기도 하다면서요.

“저는 인생에서 세 가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구와 있을 것인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세 가지를 정해두면 선택도, 삶도 심플해집니다.”

먼저 ‘누구와’입니다.

“누구와 있을 때 내가 나답게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과 있으면 즐겁고 편안하고 안정된다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은 만나면 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두 번째는 ‘어디에’입니다. 야마구치 자신의 삶을 예시로 들었죠.

야마구치는 현재 도쿄에서 꽤 떨어진 바닷가 마을에 살아요. 2015년, 마흔다섯이던 그는 도쿄의 고급 맨션 생활을 접고 가나가와현 하야마로 이사했죠. 도쿄 컨설팅회사까지 출근 시간이 50분에서 1시간 45분으로 늘어났죠. 그래도 옮겼습니다.

“저한테는 가족과 지내는 장소가 중요했어요. 도쿄에서는 생활공간이 좁아지기 쉬우니까, 가족과 함께 보내는 공간을 더 풍요롭게 만들려면 도쿄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출퇴근에 시간이 걸리고 일이 조금 더 피곤해지는 것보다, 주말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과 아이가 자라는 환경의 우선순위를 더 높게 둔 거죠.”

살던 곳을 바꾸자, 뜻밖의 변화도 생겼습니다.

“주거 환경을 바꾼 것이 판단 기준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됐습니다. 도쿄에선 누가 더 좋은 차를 타는지, 누가 더 비싼 브랜드를 입는지 같은 걸 적잖이 의식하며 살았어요.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꽤 있었거든요. 반면 지금 사는 곳에선 사람들이 비치 샌들을 신고 다니고, 브랜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문화가 강합니다. 저는 이쪽이 훨씬 편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바닷가 생활을 보며 종종 “부럽다”고 한대요. 그럴 때 야마구치는 “그럼 살면 되지 않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대개 “일 때문에 어렵다”는 답이 돌아와요.

그는 순서를 뒤집어보라고 합니다.

“직장을 먼저 정하고 그 주변에서 살아야 한다는 건 누가 정한 규칙일까요. 먼저 살고 싶은 곳을 정하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방식도 있을 수 있죠. 그게 일본이 아니라 뉴질랜드나 이탈리아라면, 이탈리아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거죠.”

마지막은 ‘무엇을’입니다. 야마구치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을 고르려 한다”고 했어요. 억지로 자신을 몰아붙이거나, 왜 하는지 설명하기도 어려운 일을 붙잡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역시 최근에는 일을 많이 정리했대요.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누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는 점점 받지 않게 됐다고 했죠. 그게 돈이 되더라도 말이에요.

“복잡한 프로젝트를 제안받으면 욕심이 날 때도 있어요. 대개 그럴듯해 보이거든요.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왜 이 일을 하는지 심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대체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최근 5년 동안은 기분 좋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만 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물론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이 세 가지를 모두 완벽하게 만족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장소를 조금 양보할 수도 있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일의 일부를 내려놓을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우선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는가’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예요. 내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과, 있고 싶은 장소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면 저는 그게 궁극적으로 심플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닷가 마을 하야마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장작 난로에 불을 피우는 야마구치 슈.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자신의 기준으로 선택하는 것. 그가 말하는 심플한 삶이다. ⓒ야마구치 슈 블로그


롱블랙 프렌즈 K 

인터뷰 전엔 궁금했습니다. 광고와 컨설팅을 오가고,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야마구치 슈의 삶은 왜 정작 본인에겐 심플할까. 

두 시간 남짓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그의 삶에 선택지가 적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놓아도 되는지가 분명했기 때문이에요.

세상의 선택지는 앞으로도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더 많아지겠죠.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또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그 수많은 답 앞에서 ‘나는 무엇을 먼저 둘 것인가’라고 스스로 묻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상가이자 경영 컨설턴트 야마구치 슈. 그는 경영 전략과 철학, 미학을 넘나들며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일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탐구해 왔다. ⓒ야마구치 슈
야마구치 슈는 꾸준히 책을 쓰며 동시대의 변화를 해석하고, 우리가 새롭게 생각해 봐야 할 아젠다를 제시해 왔다. 사진은 그의 대표 저서들. ⓒ다산초당, 김영사
한국·일본과 달리, 핀란드에선 공동 세탁실을 함께 쓰는 문화가 흔하다. 야마구치는 이런 차이를 낯설게 바라보는 ‘문화인류학적 관찰자의 감각’에서 새로운 아젠다가 생긴다고 말한다. 사진은 1990년 헬싱키의 공동 세탁실. ⓒIlari Järvinen / Helsinki City Museum
2023년 집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야마구치 슈. 과 강연 밖의 일상에서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쓰며 살아간다. ⓒ야마구치 슈 유튜브
야마구치는 선택의 부담을 설명하며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인용했다. 자유가 커질수록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부담도 커진다는 문제를 다룬다. 사진은 1994년 영문판 표지. ⓒHolt Paperbacks
야마구치는 2015년 가족과 지낼 환경을 더 중요하게 여겨 도쿄에서 하야마로 옮겼다. 그에게 심플한 삶은 무엇을 소중히 할지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선택하는 일이다. 사진은 하야마 해안에서 바라본 후지산. ⓒQuercus acuta / Wikimedia Commons

사상가이자 경영 컨설턴트 야마구치 슈. 그는 경영 전략과 철학, 미학을 넘나들며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일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탐구해 왔다. ⓒ야마구치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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