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롱블랙 프렌즈 C
내가 만든 동호회가 연 매출 2400억원*을 버는 브랜드가 된다면?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나요? 저, 이 일을 해낸 사람을 만날 기회를 얻었어요.
*2024년 두끼의 가맹점 매출액 기준.
‘떡볶이 뷔페’ 두끼를 만든 김관훈 다른* CMO. 그는 2011년 ‘떡볶이의 모든 것’이라는 이름의 동호회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시작된 떡볶이 사랑이, 국내·외 410곳 넘는 매장을 둔 비즈니스로 이어졌죠.
*두끼 브랜드를 운영하는 회사 이름이다.
하나 더 흥미로운 게 있어요. 떡볶이에 눈을 뜨기 전, 그는 다니던 회사에서 ‘열정 없는 김대리’로 통했다는 거예요.
무엇이 그의 열정에 불을 지핀 걸까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차승희 아워홈 신사업 TFT 상무와 그를 만나기로 했어요. 경기도 성남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향했죠.

차승희 아워홈 신사업TFT 상무
두끼를 만든 김관훈 CMO는 ‘행동력이 남다른 사람’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위해선 물불 안 가리고 새로운 도전을 펼쳤거든요.
김 CMO는 2011년 최초의 ‘떡볶이 온라인 동호회’를 만들어 3000곳 넘는 떡볶이 가게를 다녔어요. 2013년 ‘달리는 떡볶이 가게’를 처음 운영한 것도 그입니다. 분식 푸드트럭을 끌고 사람들에게 떡볶이를 먹이러 다녔거든요. 이 경험이 두끼 창업까지 이어졌어요.
하지만 그가 떡볶이에 삶을 걸기 전까지, 고민하는 시간이 꽤 길었다고 합니다. 그때의 경험부터 하나씩 들어봤습니다.
Chapter 1.
떡볶이를 추억으로만 품었던 ‘열정 없는 김대리’
“저는 세상이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1979년생 김관훈 CMO가 회상한 그의 어린 시절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강원도 원주에서 농기계 대리점을 하며 큰돈을 벌었어요. 모아둔 돈은 7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에게 아낌없이 쓰셨죠.
형편이 좋았던 만큼, 어린 김관훈은 친구들에게도 베푸는 소년이었어요. 특히 떡볶이를 잘 사주는 친구로 통했죠. 부모님 대리점 옆에 ‘똘이떡볶이’라는 가게가 있었거든요. 주인 할머니는 옆집 가게 아들이 오면, 1인분만 시켜도 늘 2~3인분처럼 챙겨주곤 하셨어요.
김 CMO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떡볶이는 여기까지. 이후 그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능도 그리 잘 치지 못해, 관심 없는 전공(자원환경공학과)을 택해야 했죠.
취업도 원하지 않은 시기에 해야 했어요. 대학 4학년 때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당장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아버지 친구 회사에 들어갔어요. 석유화학용제 영업사원이 됐죠.
청년 김관훈은 한참을 방황했어요.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보니, 직장이 재미없었거든요. 7년간 ‘오늘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회사를 다녔대요. 한 번은 업무시간에 PC방에 갔다가 걸려, 월급 60%를 감봉당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그는 사내에서 ‘열정 없는 김대리’로 통했어요.
그가 생각을 바꾼 건 서른셋이 된 2010년.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면서였어요. 학창 시절엔 반장을 도맡던 그였는데, 이날은 자신감이 떨어져 있었죠. 감봉 때문에 밥값도 시원하게 내지 못하는 자신이 못나 보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뭘 했나 싶어 버스에서 계속 울었어요. 동시에 생각했습니다. ‘아, 나도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문득 떡볶이가 떠올랐어요. 돌이켜 보면 제가 가장 인정받고, 환영받았다고 느낀 순간이 친구들에게 떡볶이를 사줬을 때였거든요. 그 기억 하나로 떡볶이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Chapter 2.
요리 초짜, 동호회를 만들어 돌파구를 찾다
사실 김관훈 CMO는 떡볶이를 만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먹는 건 잘했지만요. 그래서 일단 ‘떡볶이 동호회’를 만들기로 해요. 마니아들을 모아 레시피와 맛집 정보를 얻어보자는 마음이었죠. 2011년 7월, 그는 ‘떡볶이의 모든 것’이라는 네이버 카페를 열었어요.
그는 매일 ‘떡볶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뉴스와 블로그 글을 정독하고 스크랩했어요. 이 기록을 카페에 올렸죠. 또 거래처를 갈 때면 근처 떡볶이집에 들렀어요. 떡볶이를 먹어보고 후기도 남겼죠.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에요. 동호회를 만든 지 4개월 만에 그는 한 브랜드의 레시피 경연 심사를 맡게 돼요. 사실 김 CMO가 떡볶이 레시피를 공부하러 간 게 계기였어요. 현장에서 그가 자신을 ‘떡볶이 동호회장’이라고 소개하자, 주최 측에서 심사 참여를 제안한 거예요.
“신기했어요. 동호회원 수가 고작 10명이던 시절이거든요. 회사에서 혼만 나던 직장인이 갑자기 전문가로 불리며 레시피 심사를 하다니. 그간 느끼지 못한 자존감이 차오르는 기분이었어요. 그때 ‘떡볶이가 내 운명’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확신이 든 김 CMO. 다음날로 회사에 사표를 냈어요. 이제 자신의 열정을 불태울 곳을 찾았거든요.

떡모닝, 36만km를 달려 브랜드가 되다
회사를 떠난 김 CMO, 그때부터 ‘떡볶이 생태계’ 탐구를 본격화했어요.
먼저 요리 학원 세 곳에 등록해 떡볶이를 배웠어요. 전국의 떡볶이 맛집을 돌기 위해 자동차도 구했습니다. 이때 마련한 게 ‘모닝’이었죠. 동호회 로고 ‘떡볶이의 모든 것’을 래핑해, ‘떡모닝’이라고 불린 차예요.
그는 떡모닝을 타고 2년 반 동안 36만km를 달렸어요. 부산과 서울을 430번 왕복할 거리죠. 떡볶이 가게만 3000곳, 떡 공장은 46곳을 들렀대요. 그러면서 지역마다 다른 떡볶이 생태계를 파악합니다. 부산은 물에 불린 쌀떡이 많고, 대구는 간이 세고 카레 향이 강하다는 걸 배우는 식이었죠.
김 CMO는 이때의 기록을 전부 동호회 카페에 올렸어요. 자연스레 동호회도 입소문이 나면서 회원 수도 늘었죠. 1년도 안 돼서 가입자는 6000명을 돌파했어요.
“아는 것 없이 그냥 움직였지만, 그 움직임이 다 기회로 연결됐어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까 고민도 해봤지만, 생각만 하면 바뀌는 게 없더라고요. 일단 움직이면 뭐라도 결과가 따라오곤 했습니다.”
관심사가 같은 사람이 모이니, 자연스레 비즈니스 기회도 열렸어요. 2012년 12월 어묵바를 만든 게 대표적이었죠. 동호회원이었던 부산 삼진어묵의 박용준 대표와의 협업이었어요.
당시 제품명은 ‘떡볶이의 모든 것’을 줄인 ‘떡모바’. 떡볶이 양념을 넣은 ‘매콤바’, 날치알이 들어간 ‘날치바’ 등 떡볶이와 잘 어울리는 7가지 어묵바를 내놨어요. 성과는 어땠냐고요? 한때 월 매출이 4000만원에 달할 정도로 잘 팔렸대요. 자연스럽게 ‘떡볶이의 모든 것’은 동호회이자 브랜드가 됐죠.

Chapter 3.
떡볶이 실험실이 된 최초의 분식 푸드트럭
2년 정도 ‘떡볶이의 모든 것’ 회장으로 활약한 김 CMO, 2013년부터 ‘떡모 푸드트럭’을 시작했어요. 계기는 한 동호회원의 말 한마디에서 나왔어요.
“좋아하는 배우가 일할 때 떡볶이를 먹이고 싶다”는 말에 김 CMO가 중고 트럭을 샀거든요. ‘떡볶이 동호회장인 내가 촬영장에서 떡볶이를 대접해 보자’는 마음이었죠.
“돌이켜 보면 무모한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푸드트럭이 활성화한 시기는 아녔거든요. 하지만 그때의 전, 떡볶이에 관한 거라면 뭐든 실행으로 옮겼어요. 그 존재가 삶의 원동력이었으니까요.”
근데 문제가 생겼어요. 동호회원이 좋아한 배우가 한동안 휴식기를 가진 거예요. 이대로 푸드트럭을 놀릴 수 없던 김 CMO, 블로그에 “어디든 가는 떡볶이 푸드트럭이 있다”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2013년 6월, 배우 수지의 팬클럽에서 연락이 왔어요. 드라마 촬영장에서 떡볶이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었죠. 김 CMO는 당장 현장에 달려갔어요. 그렇게 100인분의 떡볶이를 만들었죠.
한 번의 기회가 비즈니스 확장으로 이어졌어요. 팬들 사이에서 “김밥보단 따뜻한 떡볶이를 촬영장에 보내면 좋다”는 소문이 난 거예요. 팬클럽은 물론, 촬영 스태프들도 떡모 푸드트럭의 이동식 떡볶이를 요청하기 시작했어요. 바쁠 때는 하루 세 곳을 돌 정도로 인기였죠.
김 CMO는 푸드트럭을 ‘떡볶이 실험실’처럼 활용했어요. 현장을 돌 때마다 조금씩 레시피를 바꾸면서 새로운 맛을 제안했거든요. 전국 떡볶이집을 돌며 배운 기록이 곧 신메뉴 아이디어로 이어졌어요. 지금도 두끼에서 파는 짜장 소스나 궁중 소스도 이때 나왔다고 합니다.
떡모 푸드트럭은 1년 만에 광주, 대구 등 5개 지역에 가맹점을 둘 정도로 성장했어요. 떡볶이를 요청하는 고객도 다양해졌죠. 한국 연예인을 좋아하는 해외 팬들의 의뢰도 들어왔거든요.
여기서 김 CMO는 또 다른 기회를 발견해요. 해외 팬들과 대화할 때마다 떡볶이를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는 점이었죠. 자연스럽게 ‘해외에도 떡볶이를 알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던 그,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해요.
“제가 해외에 푸드트럭을 다 보낼 수는 없잖아요? 해외에 떡볶이를 알리는 데 맞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그게 떡볶이 매장을 둔 프랜차이즈 브랜드였죠.
이때 지은 이름이 ‘두끼’입니다. ‘떡볶이로 한끼, 볶음밥으로 두끼’에서 따왔어요. 마니아들 사이에서 진리처럼 통하는 말이었죠.”

Chapter 4.
‘나만의 레시피’ 만드는 떡볶이 뷔페를 설계하다
김관훈 CMO는 두끼 운영 모델을 처음부터 ‘뷔페식’으로 설계했어요.
그가 제안한 방식은 단순해요. 6가지 떡과 채소나 소시지 등의 재료를 골라 냄비에 끓인 뒤, 9가지 소스를 섞어 내가 원하는 맛을 만드는 식이죠. 2014년 서울 안암동 고대 앞 1호점을 열 때부터 이 방법을 택했어요.
왜 뷔페식을 떠올린 걸까요? 김 CMO는 말합니다. “오리지널 하나만 고집하면 실패할 거라고 봤다”고.
“세계에도 떡볶이를 전하려면, 한 가지의 오리지널 맛만 강요하면 안 된다고 봤어요. 우리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떡볶이 맛이 다르고, 사람들마다 각자 선호하는 떡볶이 맛이 다르거든요. 외국인은 더 그렇겠죠? 떡볶이 맛에 적응하게 하려면 두끼는 뷔페식으로 운영돼야 했어요.”
김 CMO가 말한 떡볶이 뷔페가 먹히는 이유, 정리하면 이런 거였어요. 그가 동호회와 푸드트럭으로 전국을 누비며 깨달은 거라고 했죠.
① 떡볶이는 가게마다 레시피가 다르다.
② 맛의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음식이다.
③ 그러니 손님이 자기 입맛에 맞게 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유명한 떡볶이라도 나한테 안 맞을 수 있어요. 한 번은 동호회원 40명과 지역 떡볶이 맛집에 간 적이 있어요. 먹고 나서 후기를 말하는데, 10명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즉, 맛집은 있지만 그게 나한테 최고의 맛이 아닐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답이 나와요. 각자의 1등 떡볶이가 다르다면, 그걸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도우면 된다는 것.”
그렇게 제안한 떡볶이 뷔페. 김 CMO의 예상대로 빠르게 성공했어요. 두끼는 론칭 1년 만에 전국에 46개 매장을 열었죠.

Chapter 5.
15년 차 떡볶이 동호회장의 메뉴 기획법
물론 뷔페를 열었다고 해서 손님들이 줄지어 매장을 찾는 건 아닐 겁니다. 김관훈 CMO는 말해요. “두끼의 힘은 ‘다채로운 선택지’에서 나온다”고.
떡볶이의 핵심 축인 떡부터 살펴볼까요. 두끼는 우리에게 익숙한 쌀떡과 밀떡 외에, 얇은 ‘후루룩떡’과 가운데 구멍이 뚫린 ‘구멍떡’ 같은 걸 제안해요.
예를 들어 ‘후루룩떡’은 2013년 김 CMO가 푸드트럭을 운영할 때 개발한 떡이에요. ‘외국인들이 떡볶이를 낯설어하니, 파스타처럼 그들에게 친근한 모양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나왔죠.
소스는 더 다채로워요. 기본적으로 9가지를 제안하죠. 여기엔 김 CMO가 전국을 다니며 익힌 소스가 있어요. ‘부산소스’는 고추장과 물엿을 베이스로 한 입에 감기는 매콤 달콤한 소스예요. ‘동대문소스’는 깔끔하게 매운맛을 품고 있죠. 원하면 카레 가루도 넣을 수 있게 준비했어요.
반대로 보편적인 입맛을 겨냥한 소스도 있어요. 두끼의 대표 소스로 불리는 ‘떡모소스’입니다. 김 CMO는 “가장 맛있는 게 아닌, 지극히 평범한 맛의 소스”라고 소개해요. 독특함 대신 달콤함과 매콤함 사이의 맛을 원하는 고객을 위해 준비한 거죠.
흥미로운 건, 해외 매장의 메뉴는 국내와 다르다는 겁니다. 총 24개 재료 중 16개는 한국과 같지만, 남은 8개는 현지에 맞춰 기획하죠. 대만의 두끼 매장에는 훠궈에 자주 들어가는 고수, 새우, 완자가 있는 식이에요.
“저희가 처음 시작할 때 슬로건은 ‘떡볶이로 한끼, 볶음밥으로 두끼’였어요. 그런데 글로벌 진출 후엔 바뀌었어요. ‘마이 시크릿 레시피My Secret recipe’로요. 어느 나라에 사는 누구든 내 입맛에 맞는 떡볶이를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두끼는 어느 나라든 나갈 수 있는 거예요.”

일단 실험하자, 진짜 기회가 올 때 달릴 수 있도록
여기서 김 CMO는 “한 발짝 더 나아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떡볶이에도 새로운 떡과 소스가 계속 필요해 실험을 한다는 거예요. 단, 그는 실험을 하는 이유가 조금 다르다고 말했어요.
“그저 비즈니스를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메뉴를 찾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 ‘떡볶이의 모든 것’ 동호회장으로서 새로운 맛을 소개하려는 마음이 더 커요. 내가 좋아하는 걸 더 알려주고 싶은 거죠.”
그는 메뉴 실험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아이템은 ‘마라 소스’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재밌어요. “가장 성공한 아이템이면서 가장 크게 실패했던 아이템”이라는 거였죠.
처음 마라 소스를 두끼 매장에 내놓은 건 2018년이었다고 합니다. 트렌드라 생각해 내놓은 건 아녔어요. 세상에 있는 소스를 다 떡볶이에 넣어보다 개발한 거였죠. 하지만 마라 향을 싫어해 항의하는 손님이 많았대요. 한 달 만에 매장에서 소스를 빼야 할 정도였죠.
하지만 김 CMO는 끈질기게 ‘마라 소스’를 키웠어요. 2019년에 한 번 더 소스를 매장에 올렸죠. 이때는 항의가 들어오진 않았지만, 많이 나가진 않았대요. 6개월 만에 다시 소스를 뺐죠.
2022년, 김 CMO는 다시 한번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마라탕 유행이 부는 시기였죠. 4년 전에 만든 소스를 ‘찐마라소스’라는 이름으로 내놓았어요.
반응은 어땠을까요? 출시된 날, 재료가 소진돼 전국 매장이 오후 6시에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하루 매출액으로만 7억원을 기록했죠.
“저는 지금도 새로 선보이고 싶은 게 많아요. 그러다 보니 시대와 유행을 앞설 때도 있었죠. 실패도 했고요. 하지만 이렇게 준비를 하면 진짜 기회가 왔을 때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변화에 올라탈 수 있죠.
사실 두끼를 따라하는 브랜드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희를 따라오기는 해도 앞서진 못할 거라고 봐요. 저처럼 떡볶이에 미친 사람이 있어야 하거든요. 떡볶이로 우리 속도를 이기려면, 동호회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겁니다.”

Chapter 6.
미칠 거라면, 꾸준히 미쳐야 한다
김관훈 CMO는 자신을 떡볶이에 미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단, “꾸준히 미쳐있다”는 단서를 달았죠.
“다들 처음에는 ‘미쳤다’고 하다가 꾸준히 하나만 파고 있으니, 어느 순간 ‘쟤는 원래 저렇지’로 바꿔보기 시작했어요. 제가 만약 중간에 멈췄다면 진짜 미친 사람으로만 남았을 거예요. 이제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 떡볶이에 진심인 사람으로 인정받은 거죠.”
그 말을 증명하듯, 그는 지금도 ‘떡볶이의 모든 것’ 카페에 매일 출석 체크를 해요. 한 달에 떡볶이에 쓰는 돈도 50만원이 넘는다고 하죠.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는 게 그의 말이에요.
“내가 잘하는 일, 이미 오래 해온 일로도 성공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성공하고 싶다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걸 택하는 쪽이에요. 잘하는 일은 상황이 안 풀리면 포기하지만, 좋아하는 일은 그 자체로 계속할 이유가 되거든요.”
그래서 김 CMO는 떡볶이에만 집중하기 위해, 2023년 두끼의 운영사 ‘다른’의 대표직도 내려놨습니다. 사업보다 떡볶이를 널리 알리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마케팅을 맡기로 한 거였죠.
앞으로의 계획도 명확해요. 떡볶이를 해외에 더 많이 알리겠다는 것. 두끼는 2015년 상하이 1호점을 시작으로, 11개국 167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는 “머잖아 해외 매장 숫자가 국내(244개)를 넘어설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저는 기업 대표보다는 떡볶이 동호회장, 세계 1호 떡볶이 명장이 되고 싶어요. 다시 푸드트럭을 타고 세계를 돌며 떡볶이를 알리는 예능도 만들어 보고 싶죠. 이에 대한 버킷리스트도 썼을 정도예요.
물론 당장 못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하지만 40대인 제가 60대가 되면 이룰 수도 있겠죠. 제가 15년간 꾸준히 조금씩 행동하며 배운 게 있어요.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다 보면, 너무 높아 보인 목표도 어느 순간 눈앞에 온다는 것. 저는 그걸 향해 지금도 달리고 있습니다.”


롱블랙 프렌즈 C
두끼의 창업자 김관훈 CMO의 이야기, 재밌게 읽으셨나요? 저는 제게 남은 배운 점을 이렇게 메모했어요.
1. 작은 추억도 소중히 간직하자. 내 삶의 열정을 불태우는 아이템이 될 수 있다.
2. 경험이 없어도 발품을 쌓으면 성장할 수 있다. 그때 쌓은 기록이 결국 경험치가 된다.
3.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좋아하는 일이라도 오래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 처음엔 ‘미친 사람’이라 해도, 계속하면 ‘믿을 만한 사람’이 된다. 멈추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르게 본다.
오늘 노트가 누군가의 마음에도 작게나마 불을 지필 수 있기를 바라요. 주변에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이 있다면, 아래의 24시간 무료 링크를 함께 공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