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모드
글자크기 조정
본문을 원하는 크기로 조절해보세요.

브라더스키퍼 : 칼을 품고 자란 보육원 소년, 식물로 형제들의 삶을 지키다

카카오톡 채널 이미지
'카카오톡'으로 노트 알림을 받아보세요! 알림 신청
카카오톡 채널 이미지
'카카오톡'으로 노트 알림을 받아보세요! 알림 신청


롱블랙 프렌즈 C 

‘보육원 출신’을 채용 1순위 조건으로 내거는 조경 회사가 있어요. 2018년에 시작된 ‘브라더스키퍼’. 벽에 식물을 심는 ‘벽면녹화’ 시공을 주력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이에요. 서울시청과 포스코, 현대중공업과 이니스프리 등이 이들에게 일을 맡겼죠. 

왜 보육원 출신을 뽑냐고요? 이곳을 만든 김성민 대표가 보육원에서 자랐거든요. 그는 세 살에 보육원에 맡겨진 뒤, 부모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자랐어요. 하지만 ‘나처럼 자란 아이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브라더스키퍼를 열었죠. 지금은 11명*의 직원과 함께 식물을 돌보고 있어요.
*직원 11명 중 8명이 보육원 출신 자립준비청년이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일해왔을까. 직접 들어보고 싶었어요. 2025년 5월 21일, 김 대표를 경기도 하남시의 한 카페에서 만났어요. 남색 반소매 티에 검은 뿔테안경을 쓴 그는 제게 인사를 건넸죠. “인터뷰나 미팅을 하면 주로 여기로 와요. 카페 식물이 참 예쁘거든요.” 그 자리에서 4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를 담아드릴게요.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

1985년 6월 2일. 주민등록증에 적힌 제 생일입니다. 진짜 생일은 아니에요. 1988년 경상북도 안동의 한 보육원에 맡겨졌을 때, 선생님들이 제 발육 상태를 보고 추정한 겁니다. “세 살쯤 됐겠다”고 하면서요. 김씨 성도 원장님의 성을 따서 만들어졌죠. 

저는 16살 때까지 분노에 가득 차 있었어요. 보육원에선 굶주림과 형들의 폭력에, 학교에선 선생님의 차별과 친구들의 놀림에 시달렸죠. 중학생 때는 가방에 식칼을 넣고 다녔어요. 저를 버린 부모님이 원망스러웠거든요. 만나면 꼭 복수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지금은 어떠냐고요? 가끔 지하철을 타면, 눈이 마주친 노인 분들을 오래 바라봐요. ‘부모는 자식을 보면 알아본다던데, 혹시 저분일까’ 싶어서요. 

회사에서 불리는 제 이름만 봐도 알 거예요. 브라더스키퍼에선 모두가 식물로 이름을 정합니다. 저는 바비아나Babiana예요. 꽃말은 ‘단란한 가정’이죠. 


Chapter 1.
이름도 생일도, 부모에게 받은 건 아무것도 없지만

제 인생의 첫 기억은, 보육원 형들이 저를 물에 빠뜨리면서 깔깔 웃는 모습이었어요. 보육원의 삶은 거칠었습니다. 아이들은 80명이었는데 선생님은 2명이었죠. 중고등학생 형들이 폭력으로 질서를 잡았어요. 나중에는 안 맞으면 불안하더라고요. ‘언제 때리려나’ 싶었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알게 됐어요. 대부분의 아이에겐 부모가 있다는 걸. 입학 첫날 담임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빠 없는 사람은 왼쪽 손, 엄마 없는 사람은 오른쪽 손 들어.” 양손을 다 든 아이는 저밖에 없었어요. 

소문이 나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놀리기 시작했죠. 형들이 하던 대로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안 건드리더군요. 중학생 때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처음으로 꿈이 생긴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교회에서 온 봉사단 형, 누나들의 다정함에 빠졌죠. 자연스레 그들이 믿는다는 종교에도 관심이 생겼습니다. 

신앙심이 생기니 생각도 달라졌어요. ‘내가 고아인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나처럼 힘든 아이들을 돕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거야.’ 나름 성경도 읽으면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스무 살이 되면 보육원을 나가야 했거든요. 보육원을 나간 형, 누나들의 소식은 암담했습니다. “그 형은 교도소에 갔대”, “그 누나는 성매매한대”라는 식이었죠. 

2004년, 불안에 떨며 스무 살을 맞았습니다. 졸업식이 끝나고 2주 만에 보육원에서 나왔어요. 당시 제 손엔 아는 형이 준 5만원이 전부였죠. 무작정 서울행 버스를 탔습니다. 강변터미널에서 노숙을 시작했어요.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내놓은 배달 음식을 먹으며 배를 채우고, 화장실에서 추위를 피했죠. 

이 삶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6개월간 숙식을 준다는 식당에 들어가 돈을 모았어요. 삶이 조금씩 바뀌더군요. 보육원으로 봉사활동을 다니는 NGO(비영리단체)에 취업하고, 대입에 성공해 사회복지학을 공부했어요. 저처럼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돕고 싶었거든요. 

김성민 대표는 1988년 경북 안동의 한 초등학교에서 발견돼 보육원에 맡겨졌다. 사진은 김성민 대표(위에서 세 번째)의 보육원 시절. ⓒ브라더스키퍼

Chapter 2.
후원과 일자리보다 먼저 필요했던 것

NGO에서 일한 7년은 참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괴롭기도 했어요. 후원만으로는 보육원 아이들의 삶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후원이 끊기면 삶이 망가지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어요. 

문제는 이랬습니다. 아이들이 보육원을 나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 돈을 벌면 저축해야 한다는 사실도, 일을 구하고 싶으면 알바천국 같은 플랫폼을 봐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방향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일자리를 연결해 보기로 했죠. 마침 다니던 교회에 사업가분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어요. 그분들께 부탁해 아이들의 일자리를 연결했습니다. 6개월간 100명 넘는 아이들이 일할 곳을 찾았죠.

하지만 이 판단이 틀렸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한 달도 못 버티고 그만뒀거든요. 궁금해서 사장님과 아이들에게 이유를 묻고 다녔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었어요. 바로 ‘피해 의식’이었죠. 

아이들은 정서적 결핍 문제를 겪고 있었어요. 칭찬도, 지적도 받아들이지 못했죠. 일을 잘한다고 하면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 잘해주나?’, 혼내면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 무시하나?’라고 생각한 거예요. 

아차 싶었습니다. 후원이나 일자리보다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정서적 결핍을 채우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죠. 다만 방향은 잡았지만, 뭘 해야 할지는 몰랐습니다. 

힌트를 얻은 건, 회사를 6개월 넘게 다니고 있는 한 아이를 만나면서였어요. 조경 기업 ‘창조원’에서 식물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뭐가 좋았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식물을 돌보면서 저도 마음이 평안해졌어요.”

롱블랙과 인터뷰 중인 김성민 대표. 그는 스무 살에 노숙을 하며 ‘보육원을 나온 아이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꿈을 가졌다. 이후 NGO에 들어가고 대학도 다니며 자립준비청년들을 도왔다. ⓒ롱블랙

Chapter 3.
식물로 동생들을 지키는 브라더스키퍼

‘식물’과 ‘평안’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정말 그런지 논문도 찾아봤어요.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보다, 사랑을 줄 때 정서적 회복력이 몇 배는 더 높다’는 연구 결과 같은 게 보였죠. 식물을 가꾸는 게 사랑을 주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조경은 보육원 아이들이 배운 것과도 맞는 사업이었어요. 아이들 대부분이 농업·공업고 출신이라 적응하기 쉬운 분야였죠. 고령화한 조경 업계에 젊은 인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도 봤습니다. 미세 먼지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던 시기라, 공기 정화의 대안으로 식물이 인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조경 기업을 세워 보육원 아이들을 고용하고 싶어졌습니다. 감사하게도 창조원 대표님이 도와주겠다고 하셨어요. “우리의 벽면녹화 기술을 무상 이전할 테니, 이걸로 사업을 해보라”고 했죠. 그렇게 2018년 5월, 사회적 기업 ‘브라더스키퍼’가 탄생했습니다. 

브라더스키퍼라는 이름에도 이유가 있어요. 실은 제가 아이들을 포기하려던 순간 떠올렸거든요. 

회사를 세우기 1년 전, 저는 꽤 지쳐 있었어요. 번 돈 대부분을 아이들을 돕는 데 쓰면서 자립준비청년의 현실을 알리려고 했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았거든요.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3개월간은 아이들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교회에서 ‘가인과 아벨’이라는 주제의 설교를 들었어요. 질투심에 눈이 먼 형 가인이, 친동생 아벨을 죽였다는 내용이었죠. 가인이 동생을 죽인 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 동생이 어디 갔느냐?” 그러자 가인은 모른 척 이렇게 답해요.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brother’s keeper입니까?” 

그 부분에서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보육원 아이들의 삶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제 모습이 가인 같았죠. 마치 하나님이 “성민아, 네 동생들이 어디 있니?”라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브라더스키퍼’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었어요. 언젠가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한다면 이 단어를 꼭 쓰겠다고 마음먹었죠. 누군가 제게 물으면 ‘저는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싶었거든요.  

김 대표는 조경에서 자립준비청년을 도울 답을 찾았다. 안정적인 일자리와 정서적 안정을 함께 얻을 수 있는 분야라는 판단에서였다. ⓒ브라더스키퍼

‘욕설도 폭력도 기다린다’는 규칙을 가진 회사

브라더스키퍼의 초기 멤버는 저를 포함해 네 명이었어요. 보육원을 퇴소한 20대 초반 남성들이었죠. 아이들은 과거의 저를 보는 것 같았어요. 욕설과 폭력이 일상이었거든요. 

저는 규칙을 하나 세웠습니다. ‘지각과 무단결근, 욕설과 폭력을 해도 자르지 않고 기다려 준다.’ 이유가 있어요. 아이들에게 ‘이해받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거든요. 

의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다르게 생각해요. 사람은 언제 성장할까요? 저는 부모에게 용서받고 이해받을 때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실수해도 부모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키우는 거죠. 

보육원 아이들은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부모와 같은 믿음을 주고 싶었어요.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태도는 물론, 일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직원도 있었거든요. 갈등이 많았던 건 당연했고요. 

그래도 기다렸습니다. 1년쯤 지나자 변화가 나타나더군요. 새로 온 직원이 욕하면, 똑같이 욕하던 기존 직원들이 “그럼 안 된다”며 타이르기 시작했어요. 하루는 한 직원이 밤늦게 사무실에 남아 조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답했죠. 

“제가 열심히 해야 더 많은 동생을 데려올 수 있잖아요.”

김 대표는 브라더스키퍼를 세우며 ‘지각, 무단결근, 욕설, 폭력을 해도 기다려준다’는 규칙을 세웠다. 지금까지도 이 규칙은 ‘1년간 기다려준다’는 기간 제한이 생긴 것 외에는 변하지 않았다. 사진은 김 대표와 브라더스키퍼의 직원들. ⓒ브라더스키퍼

Chapter 4.
좋은 마음을 넘어, 뛰어난 실력으로

직원들의 진심 덕분일까요, 브라더스키퍼는 차근히 성장했습니다. 설립 1년 만에 매출 2억원을 달성했죠. 코로나19 위기도 버텨내 2021년 매출은 15억원으로, 2022년엔 20억원으로 늘었어요.

비결이 무엇이냐고요. 기본은 진정성입니다. 자립준비청년들을 돕고 싶다는 진심이죠. 여기에 ‘조경 기업’이라는 정체성에 맞게 사업 실력도 다듬었습니다. 

실제로 회사 수익의 70%는 조경에서 나옵니다. 특히 기업 사옥의 식물 인테리어는 재계약률이 높아요. 저희가 고객의 불편함을 미리 파악하고 움직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희는 주 1회씩 거래처를 찾아가 식물을 관리해요. 설이나 추석 같은 긴 연휴를 앞두면 특별 관리에 들어갑니다. 물을 안 줘도 오래 사는 식물로 바꾸기 위해서죠. 사업 초 거래처에서 ‘연휴 사이에 식물이 죽었다’는 연락이 쏟아지길래, 이 불편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니스프리, 서울시청 같은 곳과 협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2020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이니스프리 공병공간’* 매장을 디자인할 땐 클라이언트의 고민을 먼저 들었어요.  
*2020년 오픈한 이니스프리의 매장이자 친환경 복합 문화공간. 화장품 공병 수거 및 리필이 가능하다. 

고민은 이랬습니다. “자연적인 이미지를 위해 식물을 놓았지만 허전해 보이고, 벌레가 꼬인다”는 것. 그래서 병충해에 강한 식물로 바꾸고, 매장 가장자리에 흩어져 있는 식물을 가운데로 모아 숲처럼 연출했어요. 

2020년 서울시청 지하 1, 2층을 장식한 ‘시민청 벽면녹화 작업’도 마찬가지였어요. 지하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풀과 함께 계절에 맞는 꽃을 벽에 설치했죠. 봄에는 라일락, 겨울에는 포인세티아*를 설치하는 식으로요. 오래 가도록 인공조명까지 달아서요.  
*멕시코 원산의 관목 식물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붉은색 포엽이 꽃처럼 피어 ‘성탄절의 꽃’으로 불린다. 

이렇게 경험이 쌓이니, 지금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을 돕는 사업 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2021년 현대중공업과 함께한 ‘희망스케치 사회공헌 사업’이 그랬어요. 보육원 벽을 식물로 가꾸는 일이었죠. 

그냥 식물만 설치하고 끝난 건 아닙니다. 보육원 아이들이 벽에 심긴 식물을 직접 돌보며 정서적인 안정을 얻게 했거든요. 그 시간을 아르바이트한 것으로 환산해 소정의 급여도 받도록 했습니다. 급여 중 일부는 자립 후 지원금으로 모아줬고요. 

브라더스키퍼는 조경 업계에서 실력으로도 주목받았다. 사진은 이들이 작업한 이니스프리 공병공간. 병충해에 강한 식물로 교체하고, 숲을 표현하기 위해 가운데로 모았다. ⓒ브라더스키퍼

Chapter 5.
‘언제까지 도와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물론 보육원 아이들의 삶을 바꾸는 방법이 조경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이들이 성장할 기회를 더 넓히고 싶었어요. 그렇게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갔죠. 

2024년에는 편의점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세븐일레븐과 손잡고 경기도 안양시에 ‘청년 그린 편의점’을 열었어요. 식물을 팔고, 자립준비청년들을 아르바이트로 채용하는 편의점이죠. 

갑자기 웬 편의점인가 싶으시죠.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작은 사장’처럼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부터 재고 관리, 진열과 손님 응대까지 경험할 수 있죠. 여기서 자기가 잘하는 영역을 발견하고 새로운 꿈을 찾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일자리뿐 아니라, 생활에 도움이 되는 교육도 만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주제는 금융이에요. 통장 만드는 법부터 월급을 받으면 얼마나 저축해야 할지도 알려주죠. 

보육원 아이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 은행과 마트에 가고, 용돈을 관리할 기회가 없거든요. 통장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도 많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돈을 모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부터 가르치려는 거죠. 

집을 구하는 법도 알려줍니다. 집 보러 갈 때의 체크리스트 같은 거죠. 남향과 북향의 차이는 무엇이다, 수압은 주방과 욕실의 물을 모두 틀어서 알아봐라, 집은 낮과 밤 두 번에 걸쳐 봐야 한다는 것까지. 필요하면 공인중개사무소에 함께 가서 계약서를 쓰기도 해요.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지원 제도에 대해 강의하는 김 대표. 브라더스키퍼는 이 외에도 자존감 같은 정서 회복부터, 경제나 주거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진행한다. ⓒ브라더스키퍼

이렇게 아이들을 돕는 동시에, 세상이 이들을 더 주목하게 하는 노력도 해왔습니다. 창업 초부터 언론·정치권에 목소리를 내며 법을 바꾸기도 했죠. 자립준비청년을 취약계층에 포함하는 법 외에도 총 22개의 법이 바뀌는 데 기여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고요? 창업 전부터 15년간 국회와 정부, 언론을 찾아다니며 제 생각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보건복지부의 한 과장님과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그분이 이렇게 묻더군요. 

“어른 될 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줬으면 다 한 거지, 언제까지 지원해 줘야 해요?” 

이 질문에 저는 이렇게 대화를 이어갔어요. 

“과장님은 언제까지 부모님이 필요하세요?”

“그게 무슨 질문입니까? 내가 죽기 직전까지 찾는 게 부모 아닙니까?” 

“맞아요. 그 누구도 ‘난 딱 이때까지 부모가 필요해’라고 할 수 없을 거예요. ‘아이들을 언제까지 지원해야 하냐’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처음부터 부모라는 존재가 없었어요. 그럼 국가가 아이들에게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영원히 지원받길 원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지원으로 성장한다면, 분명히 사회에 기여하는 멋진 청년으로 자랄 겁니다.”

이 말을 듣고는, 질문하신 분이 눈물을 쏟으셨어요. 알고 보니 당시 그분의 부모님이 지병으로 아프셨다고 해요. 아마 부모 없이 살아가는 삶을 떠올린 게 아니었을까요.

김성민 대표는 브라더스키퍼를 세우기 전부터 국회와 언론 등에 자립준비청년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 과정이 브라더스키퍼를 운영하는데 초기 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롱블랙

Chapter 6.
결국 우리도 언젠가는 고아가 됩니다

7년간 브라더스키퍼와 달려온 저, 실은 내일 회사를 떠납니다. 2025년 5월 31일이요. ‘조경 기업’ 브라더스키퍼는 코스모스(김하나 대표)*가 운영할 거예요. 저는 ‘비영리 단체’인 브라더스키퍼를 새로 시작하려 해요. 온전히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요.
*2023년 10월 대표 대행으로 부임했으며, 2025년 대표이사가 됐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한몫했어요. 2018년에는 눈이 안 보였고, 2019년에는 귀 한쪽이 안 들렸어요. 회사가 어려웠던 팬데믹 때는 알츠하이머 증상까지 왔죠.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고백하자면, 일하는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일주일에 1~2번씩 아이들이 삶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병원에 가서 아이들 모습을 보면 꼭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더라고요. 자해 흔적이 너무 많아서. 그걸 보면 제 손목도 같이 욱신거려요. 

조문객 하나 없는 장례식장은 더 마음이 무너지죠.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니까. 10년 넘게 이런 일을 겪지만 하나도 나아지지 않아요. 늘 똑같이 아팠어요. 

2024년에는 6개월간 쉬기도 했어요. 스무 살에 잠시 노숙자 생활을 한 뒤, 19년 만에 얻은 휴식이었죠. 그때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그중 하나는 ‘나는 무적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제 행복이 아이들을 살리는 일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더군요. 일로 얻는 행복뿐 아니라, 내 존재 자체로 얻는 행복도 있어야 했어요. 아침에 10km 달리고, 강아지들과 산책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요. 

그 행복을 20가지 정도는 찾으려고 해요. 혹시 건강이 안 좋아져서 러닝이나 산책을 못 하더라도, 다른 걸 할 수 있도록요. 

마지막으로 이 말을 전하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언젠가 고아가 됩니다. 모든 사람은 부모의 죽음을 경험하게 돼 있으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남보다 먼저 그걸 겪었어요.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경험이 남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난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삶은 고되고 힘들어요. 실제로 보육원 아이들의 삶을 하루라도 살아보겠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은 그 시간을 이겨낸, 특별하고 소중한 아이들이에요. 저는 늘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더라도, 너는 그 사람을 위로하는 눈으로 바라봤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네가 먼저 지나온 삶을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이니까. 너의 삶은 많은 사람을, 그리고 이 세상을 위로할 수 있을 거야.” 

김성민 대표는 2025년 5월 31일 조경 기업 브라더스키퍼를 퇴사한다. 그는 “이제는 아이들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롱블랙


롱블랙 프렌즈 C

김성민 대표의 여정에 감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어요. 자기 몸이 상할 정도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죠. 

인터뷰 중 그와 함께 공원을 걸으며, 회사를 떠나는 마음에 대해 다시 물었어요. 그때 나눈 대화가 기억에 오래 남았어요. 이걸 마지막으로 기록하며 오늘 노트를 마칠게요.  

“에디터님은 태양이 언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세요?”

“노을 질 때 아닐까요?”

“맞아요. 모든 건 끝이 있어서 아름다워요. 저마다 쓰임 받는 시기가 있고요. 저도 지금은 지는 해라고 생각해요. 쉼 없이 달려왔고, 몸도 마음도 많이 망가졌으니까요. 그래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거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슬프지 않으세요?”

“처음엔 그랬는데, 어느 순간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사람은 각자의 계절을 살잖아요. 저 꽃도 영원히 피지 않아요. 길어야 두 달. 그런데 바로 그 시간만 피기에 더 아름답고, 더 소중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 당장 삶이 힘들어도, 너무 낙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어쩌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니까요. 한겨울에 노숙하면서 꿈을 찾았던 저처럼요.” 

다른 콘텐츠를 보러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