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롱블랙 프렌즈 B
서울에선 하루에도 수십 채의 건물이 사라지고 태어납니다. 어제 본 건물이 오늘 공터로 바뀌는 일은 그리 낯설지 않죠. 그게 도시의 속도니까요.
그런데 어떤 건물은 사라진 뒤에도 꾸준히 기억됩니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Millennium Hilton Seoul이 그렇죠. 우리 건축가가 1983년 설계한 특급 호텔이자, 한국과 세계를 이어 준 랜드마크였어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연회, 1990년 분단 이후 첫 남북고위급회담이 이곳에서 열렸죠.
노후화와 경영난으로 호텔은 2022년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의미를 되새기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가적 유산으로 보존하자”는 주장과 “기억으로만 남기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붙기도 하죠.
궁금했습니다. 쉽게 사라지는 것과 오래 기억되는 것의 차이는 뭘까. 마침 남산 피크닉에서 힐튼 서울의 회고 전시 <힐튼 서울 자서전>이 열리고 있었어요. 심영규 건축PD의 소개로 그곳을 찾은 김종성 건축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힐튼을 설계한 ‘한국 건축 1세대’의 주역이죠.

심영규 프로젝트데이 대표·건축 PD
아흔 살의 건축가는 대화 내내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습니다. 또렷한 눈망울과 목소리로 과거와 현재를 오갔죠. 전쟁 후 폐허가 된 서울의 풍경부터, 그 위를 덮은 건물 이름까지 세세히 기억했어요.
그의 건축도 본인의 또렷함을 닮았습니다. 종로 SK사옥부터 서울역사박물관, 아트선재센터, 서울올림픽 역도경기장까지. 모두 40~50년의 세월을 지나 꾸준히 쓰이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