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 : 자연주의 정원의 대가, 아름다운 공간의 조건을 말하다


롱블랙 프렌즈 K

겨울의 정원은 그것대로 아름답습니다. 바람이 불자 마른 좀새풀이 너울거립니다. 연갈색으로 말라버린 수국 꽃잎, 앙상한 가지가 붉게 빛나는 말채나무. 시든 풀 사이에서 이끼와 고사리는 더 푸릅니다. 2000평 남짓한 정원은 모든 풍경이 익숙한 듯 새롭습니다.

이곳은 제주 서귀포시 ‘베케 정원’입니다. 조경전문가인 김봉찬 더가든 대표가 2018년 만들었습니다. 그는 한국 생태주의 정원의 대가입니다. 경기 포천시 평강식물원, 경기 광주시 화담숲의 암석원, 제주 서귀포시 핀크스 비오토피아 생태공원, 서울 성수동 아모레 성수가든이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새해 첫 월요일에 김봉찬 대표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그가 일을 통해 아름다움을 정의하고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찾아낸 아름다움의 본질은 저의 삶을 돌아보게 했어요. 한국적인 것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획한, 롱블랙 코리안위크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김봉찬 더가든 대표

제주 사람입니다. 부모님은 귤밭을 하셨어요. 바로 이 베케 정원의 땅에서요. 밭을 일구면 큰 돌들이 나오잖아요. 그 돌을 아무렇게나 구석에 던져두셨어요. 그 돌무더기를 제주 말로 베케라고 합니다.

베케는 제 놀이터였습니다. 여름이면 그 위에 올라가 가만히 앉아있기도 했어요. 엉덩이가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거든요. 이끼가 앉은 베케를 보면 가끔 울컥, 감정이 솟구칩니다.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그러니 고향에서 만든 저의 첫 정원을 베케라고 이름붙인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제 정원을 보는 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베케 정원은 알록달록하지 않습니다. 잘 다듬은 나무도 없습니다. 제게 정원을 만든다는 건 식물로 땅을 장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물에는 편안히 살 터전을 마련해주고, 사람에겐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게 자연주의, 다른 말로 하면 생태주의 정원입니다.

Chapter 1.
열 일곱, 한라산에서 식물에 눈 뜨다

전 운이 좋았습니다. 평생의 길을 일찍 찾았어요. 열 일곱에 알았습니다. 나는 식물을 사랑하는구나, 평생 이걸 해야겠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외아들이니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고2 때 절에 들어갔습니다. 마음 잡고 공부를 해보겠다고요. 한라산 남쪽 자락의, 버스를 내려서도 40분 산길을 올라가는 곳이었어요.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절에서 1년을 지내며 학교를 오갔습니다. 그때 자연에 눈을 떴어요. 주말이 되면 할일이 없었어요. TV도,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들에만 나가면 행복한 거예요. 지천에 꽃과 풀이었습니다. 연분홍 꽃이 줄기를 감싸며 올라가는 타래난초, 여우 꼬리를 닮은 보라꽃이 곧게 올라가는 긴산 꼬리풀, 별처럼 노란 꽃이 쌀알처럼 피어나는 마타리…

넋을 잃고 구경했어요. 오래 보려고 식물을 꺾어다가 신문지에 끼우고 벽돌로 눌렀어요. 배우지 않았는데 혼자 식물 표본을 만든 겁니다. 그렇게 모은 표본이 200개가 넘어갈 때쯤 제주대 생물학과에 입학합니다.

대학이 너무 좋았어요. 생각해보세요. 제주도에서 자라는 전체 식물이 1800종 정도입니다. 제가 채집한 식물만 200여종이었잖아요. 예습이 잘 된 학생이었던 거죠. 공부가 너무 쉽고 재미있었어요. 대학원까지 가서 식물을 파고 들었어요. 당시 제주 최고였던 여미지식물원을 어렵지 않게 입사했습니다.